사람이 착하게 살 수 있을까? 어떤 삶이 착한 것일까?
한국 사회에서 기부 문화가 발전해 가고 있다. 기업인들이 거액을 기부하여 착한 영향력을 끼치기도 하고, 유명인들이 소소하게 자주 기부하며 그 영향력을 전달하기도 한다. 가수 '션'(노승환) 기부 이야기는 20년째 이어진다. 한 해 두 해는 할 수 있겠지만 20년을 잇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진실로 그는 대한민국에 착한 영향력을 전달하는 기부 천사이다. 시간을 따라 기부 문화를 이끌고, 기부의 아이콘이 되어 실제 기부의 한가운데를 살아간다. 기부의 삶이 자신에게도 기쁨을 더 할 것이다.
평범한 이들도 때로 착한 일을 한다. 며칠 전, 출근길에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가까운 거리이므로 우산을 받고 걸었다. 눈앞에 초등학교 1학년 정도의 아이가 책가방을 어깨에 메었는데 우산 없이 걷고 있었다. 뛰어가 우산을 씌어 주면서 말했다.
“비 오는데, 우산이 없구나. 집에서 나올 때는 비가 안 왔니?”
아이가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혹시 유괴범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괜스레 아차 싶었다. 말없이 약 300미터의 길을 함께 우산을 쓰고 걸은 후, 말했다.
“아줌마는 여기서 근무해. 초등학교는 더 가야 하지? 이 우산을 줄 테니 쓰고 가라. 학교 다 끝나고 집에 갈 때 비가 안 오면 우산은 요기 문안에 세워두면 된다. 비가 오면 집에까지 쓰고 가고. 알았지?”
그제야 아이가 고개를 끄덕인 후, 우산을 받으며 멀어져 갔다.
문제는 사람은 항상 착하지 않다는 것이다. 착할 때가 있지만 악할 때가 있다. 착함과 악함이 동시에 공존한다. 착한 사람이 화나면 더 무섭다는 말도 그것에 기인한다. 거기에 착함과 악함의 기준이 제각각이다. 어떤 경우, 착함이 견딤이 되다가 미움이 되고, 살상이 되기도 한다. 또 다른 경우, 악함이 칭찬과 선망이 되기도 한다.
신이 처음 창조한 사람(아담과 하와)은 착했다. 악을 몰랐다. 악의 그림자도 없었다. 사람이 신에게 불복하고 선악과를 먹었을 때, 틈새가 생겼다. 우주의 피조물 중 유일하게 선물 받은 사람의 자유의지, 그것을 악이 가로챘다. 그 악이 지금 전 인류를 장악했다. 과거 어느 때보다 악이 더 크게 드러나는 것은 최소한의 도덕조차 악이 짓밟았기 때문이다.
요즘 국내외에서 전화금융사기가 심각하다. 정부에서도 손을 쓰지 못한다. 나의 지인은 3억을 당했다. 본인이 갖다 주었으므로 원망조차 할 수 없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다. 자기 폰에 입력되지 않은 전화는 무조건 받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무서운 10대들'은 어떤가? 강력범죄나 성범죄, 사이버상의 딥페이크까지 10대가 압도적이다. 단연코 부모나 어른이 10대들에게 범죄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악이 춤을 춘다. 곳곳에 괴물들이 즐비하다
미국이 대량파괴무기 개발과 테러를 일삼는 국가를 '악의 축'이라고 명명한 지도 오래되었다(2002년 부시의 연설). 그중에 우리 동족 북한 최고통치자 김정은의 행보는 최악이다.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탱크 같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근래에 자국의 이익만으로 살상 무기를 주고받으며 밀약하는 북•중•러도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말한다.
"착하게 살면 되지, 구원이 왜 필요해?"
나를 믿을 수 있는가? 아침의 생각과 저녁의 말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는가? 아직도 나를 그렇게 모르는가? 사람은 믿을 존재가 못 된다. 덮어주고 사랑해야 할 존재일 뿐이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약골이고, 악한이다. 잘하면 우쭐댄다. 못하면 입이 석 자 빠진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다. 하지만 악이라는 근본 뿌리는 모두 같다.
《명심보감》에 무릎을 칠만한 명언이 있다.
내가 악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나의 스승이요
내가 선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나의 도둑이다.
(조성호 편역. 위즈덤커넥트, 2016)
그래서 신은 사람의 구원 범주에 착함을 넣지 않았다. 다만 자기가 악함을 알아, 착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믿음을 제1 항목에 두었다. 대신 착한 행실과 도덕은 매우 강조하였다.
착함은 이타주의와 도덕에 근거한다. 그것은 사람이 살 만한 세상을 만드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한 세기 전, 명석한 철학자지만 신을 단 한 번도 개인적으로 만나보지 못했을, 프리드리히 니체가 그의 책 《선악을 넘어서》(김 수영역. 작가와, 2024)에서, "겁쟁이로서의 도덕"을 말했다. 《니체의 도덕 계보》(박서현 글. 웅진지식하우스, 2019)에서는 지난 인류 역사 2천 년간의 도덕을 가리켜서 위선 도덕이라는 의미로, "노예 도덕"이라고 혹평했다. 그의 말들이 얼마나 철학적인지를 떠나서, 역사와 사상과 도덕을 무조건 망치로 깨뜨리며, 세상을 섭리하는 신에게 끊임없이 돌멩이를 던지는 그의 글들은, '반항' 그 자체이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말한 '겁쟁이 도덕'이 얼마나 필요한가! 여기 21세기, 괴물 같은 악을 희석할 수 있다면, 그가 혹평한 '노예 도덕'일지라도 어서 가져와야 하지 않는가!
소확행을 꿈꾸는 이들이여! 여러분은 답을 알고 있다. 땅에 떨어진 도덕이 악을 더 키운 것을. 사람이 신의 자리에 앉으면서 괴물들이 곳곳에 진을 친 것을. 착하지 않아도 괜찮다. 착한 척할 필요 없다. 나는 착하지 않다. 착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그나마 나의 도덕이 나를 착하게 할 뿐이다.
여러분이여, 내가 착하지 않음을 인정하라. 내가 악의 한가운데 있음을 시인하라. 그것이 구원이다. 그것이 소확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