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비혼으로 60년을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시누이가 몹시 힘들어했다. 집 곳곳에 서려 있는 어머니의 그림자 때문이었다. 예상했고, '그러게, 미리 어머니와 떨어져야 했다'라던 사촌의 말을 되새기며 3년은 힘든 것을 알고 마음을 다잡았어도 소용없었다. 거기에 시누이가 큰 병 수술을 앞두었다.
할 수 없이 6평 원룸 월세방에서 다 같이 살 수는 없으므로, 남편과 함께 급하게 방 2~3개짜리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코로나 시국에 자연스럽게 거리 두기가 이행되어 졸혼 상태로 이어진 남편과도 합쳐야 한다는 비공식 묵계가 이루어진 셈이었다.
작년, 지금의 원룸으로 이사 온 이후, 직장에서 가까운 관계로 줄곧 살고 있었다. 원룸이 불편한 것은 작아서 여름에 답답하다는 것과 월세의 부담 정도였다. 원룸 살이는 의외로 장점이 있었다. 첫째는, 혼자 짐 없이 사는 단출함이 있었다. 둘째는, 냉장고, 에어컨, 세탁기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옷 몇 가지 들고 몸만 다니니, 편했다. 여기 오기 직전 시골에 살 때, 마땅한 전세가 없어 원룸을 사서 산 것이 계기가 되었다.
웬걸, 집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전국적인 전세 사기극 이후 지역마다 전세가 없어진 것도 이유였다. 할 수 없이 매물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결론은 적은 돈으로는 입맛에 맞는 집이 없었다. 마음에 들면 턱없이 가격이 높았다. 3주간가량 가까운 동네를 샅샅이 뒤지다가 의욕을 잃었다. 이 나이까지 출근하고 살았으되 작은 헌 집 하나 살 돈이 없구나, 시골 원룸이 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구나, 급한 일을 할 수 없으니 은근히 속이 상했다. 동료 중에 아파트로 이사하려고 내놓은 허름한 집을 전세로 계약하려다가 남편과 다툰 것도 한 이유였다. 차제에 소유와 존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에리히 프롬(1900~1980)은 그의 마지막 역작, 《소유냐 삶이냐》(정해근 옮김. 정암, 1987. 29p)에서, 독자가 소유와 존재의 차이를 쉽게 이해하도록, 영국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1809~1892)과 일본 시인 마쯔어 바쇼(1644~1694)의 시를 대조했다.
[갈라진 암벽에 핀 한 송이 꽃이여
나는 그대를 틈 사이에서 뽑아낸다.
나는 그대를 이처럼 뿌리째 내 손에 들고 있다.
작은 꽃이여 만일 내가 이해할 수 있다면
그대가 무엇인지 뿌리만이 아니라 그대의 모든 것을
그때 나는 신이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으리.]
[자세히 살펴보니
냉이꽃이 피어 있네
울타리 옆에!]
시에서, 테니슨은 꽃을 소유하기 위해 암벽 틈 사이에서 꽃을 뽑는다. 바쇼는 꽃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한다.
에리히 프롬은 이 두 시에서 소유와 존재의 차이를 극명하게 대조하여 보여 주었다. 아울러 소유와 존재의 차이는 ‘생명에 대한 사랑’과 ‘죽음에 대한 사랑’의 차이인 동시에, 인간 실존의 가장 중대한 문제라는 것을 강조했다. 또한 소유욕은 경쟁을 넘어 계급투쟁을 일으키고, 지구 전체의 국제 전쟁까지도 일으킬 수 있음을 우려했다.
소유로 살 것인가? 존재로 살 것인가? 어쩌면 이것은 모든 인생의 끊임없는 질문이요, 난점일 것이다. 원룸에 잘 살고 있으면서도 어느 지점에서는 필요 불충분으로 심란하니 말이다. 소유가 아니라 존재로만 살았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의 앙금이 없었을 것이 아닌가? 물론 완전히 존재로 살지 못했다고 해서 소유하고 소비하고 산 것은 아니었다. 또 그런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물질의 시대요, 소비의 세계에서 남과 비교하지 않으며, 존재로만 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소유냐 존재냐 질문조차 없이, 소비를 위한 소유에 목숨으로 올인하는 경우를 두려워한다. 하여 소유보다는 존재로 살아왔다고 자부함에도, 한편에서는 여전히 상처 입은 자아의 속 비명이 있는 것이다.
예수는 소유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가르쳤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새는 씨를 뿌리거나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마 6:26)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옷감을 짜지도 않는다. 그러나 솔로몬이 온갖 영광을 누렸으나 이 꽃만큼 아름다운 옷을 입어 보지 못하였다." (마 6:28~29)
결과, 복음서 시대 이후 수많은 숨은 제자들이 가르침을 따라서 청빈의 삶을 살았다. 지금 21세기, 악마들이 그의 가르침을 비웃고 짓밟아서, 존재로서 구별하여 살아야 하는 제자들이나 교회들마저도 존재가 아닌, 소유의 삶으로 전락해 버렸지만 말이다.
이 세상 사는 동안 최소한의 소유로, 지고한 존재의 삶을 살고 싶다. 그것이 소확행의 길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소확행 하는 그대들이여! 소유로부터 자유로운가? 그것이 존재의 삶이다. 소유에서 벗어나 자유로울수록 존재로서의 삶이 완성된다.
아직 그 과정 중에 있는 나와 같은 이들이여! 오늘 함께, '소유지향에서 존재지향으로의 변화를 위한 에리히 프롬의 실제 제안'을 다시 몇 개 가슴에 담아보자. 존재로의 삶에 조금 더 가까워질 것을 확신한다. (같은 책, 179p)
1. 완전하게 존재하기 위하여 모든 소유 형태를 스스로 포기할 것.
2. 안정감, 주체 의식, 확신을 가질 것.
3. 자기 이외의 어떤 인간이나 사물도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철저한 독립성과 사물에 집착하지 말 것.
4. 자기가 지금 있는 곳에 완전히 존재할 것.
5. 저축과 착취에서가 아니라, 주고 나누어 가짐에서 오는 기쁨을 가질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