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민권운동가요, 시대의 사상가인 함석헌(1901~1989) 선생과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를 잘 알 것이다.
만 리 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탓 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찬성하여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 선생은 1947년 3월 월남하여 서울에 정착하면서 7월에 이 시를 썼다고 전해진다. '죽음을 무릅쓴 월남'이라는 독특한 인생 항로를 경험한 후, 인생에는 동지든 스승이든 신이든 진정한 동행자, 동반자가 필요하다고 강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람은 혼자서 길 떠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업무차 어쩔 수 없이 떠날 때가 있지만, 길 떠남에는 대부분 동행이 있다. 가족, 친구, 모임, 단체 혹은 교회, 마을 등등이 그것이다. 해외여행이 아닌, 국내 여행조차도 혼자 여행은 거의 하지 않는다.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민족성의 한 양상일 수도 있다.(물론 근래 젊은이들에게서는 혼자 여행을 자주 보기도 한다)
1년 전 6월, 혼자 강원도 곰배령을 다녀왔다. '여행'이라는 이름을 달고 혼자 다녀온, 첫 번째 여행이었다. 이후 가평 우리 마을이나 필그림 하우스도 혼자 가서 1박하며 고즈넉한 시간을 보냈다. 중국의 만리장성도 혼자 가 보았다. 연평도도 혼자 가 보았다. 도시 버스 투어도 혼자 해 보았다. 시력 약화로 점점 책 보기가 힘드니, 가벼운 여행으로 몸을 움직여 보리라. 섬이든 도시든 여럿이 함께하는 여행을 마다하지 않겠지만, 시간을 내어 간편하게 혼자 여행하는 것도 즐기리라. 하여 여행의 재미와 의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리라, 다짐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육십 평생 살면서 혼자 여행한 적이 없었다. 젊을 때와 달리 이제는 마음을 내면 시간을 만들 수 있음에도 혼자 길을 떠난 적이 없었다. 수도원에서 1년에 한두 차례 한 주간씩 머문 것을 여행이라는 범주에 넣는다면 수십 차례 있을 것이다. 지방에 오래 살다 보니 업무차, 혹은 집안 행사나 친구들의 모임 등에 참여할 때 혼자 출발할 때가 많았으니, 여행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연코 혼자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집을 나선 적이 없었다. 의무와 책임과 사랑으로 혼자 떠났을 뿐이었다. 얼마나 놀라운 발견인지! 이것은 비단 나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혼자 여행'에는 몇 가지 장점이 있다. 먼저, 준비 없어도 편하게 떠날 수 있다. 둘째, 시행착오가 있어도 수정하거나 늦추면 그만이다. 탓할 필요가 없다. 셋째, 시간이 생기면 바로 진행할 수 있다. 넷째, 사색을 많이 한다.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이다. 다섯째, 혼자 떠나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다. 떠나는 순간부터 하늘 그분이 동행한다. 여럿이 함께하면 왁자지껄 시간을 보내지만, 혼자 여행하면 마음과 생각이 하늘로 향하는 까닭이다. '제가 오늘 이 길을 걸어요.' '야생화가 어쩜 이토록 아름다울까요!' '하늘과 땅과 세상이 다 창조주를 노래하는걸요….'
그럼에도 혼자 여행이 왜 낯설까? 그동안 무엇이 혼자 길 떠남을 막았을까?
영화 《노트북》(미국 닉 카사베츠 감독, 2004 개봉/2024 재개봉)에서는 평생 사랑한 부부가 마지막 먼 여행도 '함께 손잡고' 떠났다.
가난한 남자아이가 부잣집 여자아이에게 반해 사랑하고, 헤어졌다가 재회하여 결혼했다. 자녀들이 장성했을 때, 아내가 치매에 걸려 자식도 남편도 못 알아본다. 남편이 아내가 있는 요양원에 입소해서 생활하며, 노트북에 써 놓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아내에게 읽어준다. 다 읽어주었을 때, 아내가 자신들의 이야기인 것을 알고 잠시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기뻐하는 것도 잠시, 아내는 다시 모든 것을 잊었다. 남편도 심장병이 생겨 약해졌다. 어느 날 밤, 남편이 아내의 침대에 함께 누웠다. 손잡고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지 않았다.
인생은 누구나 혼자 여행할 때가 온다. 평생토록 사랑한 가족과 친구들을 두고 혼자 떠나야 한다. 둘이 함께 동시에 떠나는 것은 영화에서나 가능하다. 둘이 셋이 넷이 같이 살지만, 앞서거나 뒤서거나 혼자 떠나는 것이 인생이다.
미리 혼자 여행하면 마지막 여행도 연습이 되지 않을까? 혼자 여행은 주로 대자연 품에서 하늘 그분과 대화하며 오롯이 피조물로서만 순결해지니까. 인생의 마지막 먼 여행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지만, 혼자 여행하면 창조주를 더 많이 진하게 고백하므로 면죄부를 갖게 되니까. 더욱이 부부가 함께 살다가 한 사람이 먼저 떠나면 트라우마가 크다. 자주 혼자 여행하면 그것도 한결 쉬울 것이다.
여러분이여, 혼자 여행하는 묘미를 가져보라. 하늘 동행자가 더 가까이 있을 것이다. 땅의 동반자를 미리 놓는 훈련도 될 것이다. 일거양득이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