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북광장 전철역 입구가 가까워져 오면 어김없이 찬양 소리가 울려 퍼진다. ○○교회에서 나와 찬양을 들려주며 예수를 전하기 때문이다. 주일을 제외하고 주 6일간 3~5명 정도가 일렬로 피켓을 들고 서서 계속한다. 그 앞을 지나갈 때 예수를 좋아하는 나는 무조건 기분이 좋다. 하여 활짝 웃으며 엄지 척하거나 손을 흔들어 화답한다. 내가 못하는 것을 대신해 주니, 고마운 마음도 크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에 점점 더 무신론자가 늘어가는 추세이다. 작년 말, 한국 리서치 정기조사에 의하면 무종교인이 51%다. 무종교인이 모두 무신론자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생명이 있는 절대자를 따르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사람은 종교심을 갖고 출생한다. 사람의 정신 안에는 물질의 영역 외에 영원을 사모하는 신의 영역이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사람에겐 예수가 필요하다. 예수가 아버지와 더불어 사람을 그렇게 창조했으니까.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하여 예수의 말들은 예수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생명이요. 배척하는 이들에게는 신성모독이 되었다. 예수가 그저 착한 사람이요, 도덕군자 정도였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처럼 추앙만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배척자들이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인류의 생명'이었다. 결국 배척자들은 예수를 흉측한 십자가로 내쳤다.
지금도 예수에 대한 감정은 1세기와 다르지 않다. 크게 두 가지다. 좋거나, 싫거나. 중간이 없다. 그것이 '예수가 진짜'라는 증거임에도, 1세기나 21세기나 똑같이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 예수를 배척한다.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이 사람이 된 경우가 있는가? 없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은 신이 있는가? 없다. 오직 예수뿐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기독교다. 그럼에도 점점 더 대한민국에 무종교인이 많아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 밝아진 문명과 편리를 좇아가는 현대인의 삶이 한몫한다. 사람은 문명을 누리면 누릴수록 더 많이 누리고자 몰두하게 된다. 편리를 따르면 따를수록 조금도 불편을 견딜 수가 없다.
둘째, 비호감이다. 예수는 좋은데 기독교인이 싫다. 기독교인에 대한 기대치가 있는데, 턱없이 못 미친다. 구원받아 생명은 가졌으나 겉으로 다르지 않으니, 딜레마다. 작년 11월, 같은 한국 리서치 정기조사에 의하면, 현재 한국에서 불교 호감도가 가장 높다(51.3%). 다음이 천주교이다(48.6%). 개신교는 36.6%에 그쳤다. 그럴지라도 자식이 볼품없다고, 자식이 아닌가? 그럴 수 없다.
셋째, 사탄이 궤계 한다. 죽은 것에는 무엇이든지 목숨 걸고 반대하지 않는다. 예수가 2천 년 전에 사람이 되어 죽은 것은 신의 거대한 인류 구원 계획이었다. 하지만 사탄은 어찌하든지 예수를 잔혹하게 죽여야 했다. 따르는 이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무종교인을 수하에 거느리는 것이 그의 전략이다. 끝까지 산 예수를 십자가에서 짓밟아야 했듯이, 수많은 사람들의 영성을 죽여 완전하게 자기 곁에 두는 것이 그의 전술이다.
그럼에도 예수가 싫다. 기독교가 싫다. 돈을 억만금 준다고 해도 싫다. 중장년은 세월의 무게로 마음이 굳어진 까닭에 싫다. 청소년이나 젊은이들은 누군가의 간섭이 싫다. 그저 혼자가 편하다. 그래서 혼자 살아간다. 신에게 돌아와 보면 그 품이 얼마나 따뜻하고 편안하며 안락한 지를 알겠건만, 돌아오지 않으므로 알지 못한다. 문제는, 사람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힘들면 의논하고 투정 부릴 상대가 필요하다. 그렇게 지음 받았다. 어찌 인생의 큰 짐과 우수사려를 혼자 감당하고자 하는가! 혼자는 위험하다. 매우 위태롭다. 혼자여서 의논도, 견딤도 없이, 그냥 생을 내동댕이친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가족 동반 자살까지 감행한다.
하지만 사람의 삶이 그렇게 단순하게 마감될 수 있는가? 사람은 동•식물이 아니다. 신의 형상이다. 만물의 영장이다. 우주를 다스리도록 위임받은 대사다. 마땅히 내 삶을 점검받는다. 그때가 있다. 그때가 온다.
여러분은 예수가 좋은가? 싫은가? 예수는 좋고, 예수 믿는 사람이 싫은가? 여러분의 생각만으로 소중한 미래를 망치지 말라. 여러분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신의 형상대로 신을 의지하고 잘 살 수 있도록 생명의 통로가 되어라. 그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성경의 부자를 보면, 예수 없이 호화롭게 살다가 죽어 심판을 받고서야,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외쳤다. 자기가 처한 현실이 얼마나 끔찍한지,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눅16:27~28)
이것은 예수를 거절한 사람의 결국이다. 또한 조만간 누구에게나 다가올 미래이다. 싫어도, 믿지 않아도,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내가 외면하고 부인한다고, '존재'가 없어지지 않는다. 여러분이여, 돌아오라. 돌아서라. 예수에게로 마음 길을 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