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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얼굴

by 뜰에바다

올 7월의 무더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작년에 경험했어도 소용이 없다. 아침에 28~9도로 시작한다. 한밤중에도 기온이 30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온열질환이 생길까,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미니멀라이프를 주창하면서 승용차를 없앴으므로 폭염 속 보행이 어려우니,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와우, 버스정류장에 버튼이 있었고, 누군가 눌렀다. 강한 바람이 위에서 쏴~ 하고 쏟아졌다. 감동이었다. 다른 버스정류장도 마찬가지였다. 볼 일을 마치고 귀갓길에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기다리는데, 오후 3시의 불볕 속 정류장 지붕에서 냉풍이 이슬처럼 흩날렸다.

알아보니, 몇 년 전부터 지자체마다 이용도가 많은 버스정류장에 전기 냉풍을 설치했다고 한다. 간이 버스정류장에 앉을 수 있는 공간과 지붕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동이었는데, 실외임에도 겨울 난방은 물론, 여름 냉방까지 설치했다. 문명이란 얼마나 놀라운 혜택을 사람에게 제공하는가!


문명은 사람이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언어, 예술, 도시, 정치, 문화, 과학 등등에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오는 과정이다. 그것은 교육받은 인간 두뇌 작용이 낳은 독특한 결과다. 따라서 문명은 단순히 기술의 총합이 아니다. 신의 형상을 닮은 창조성의 표현이다. 사람이 신에게 받은 창조적 사명의 열매인 것이다. 하지만 문명의 발전에 비해 사람의 도덕성, 자제력, 공동체성 같은 영역은 뒤처지고 있다. 문명은 더 정교해지나 사람은 점점 단순해진다. 기억은 스마트폰에 맡기고, 판단은 알고리즘에 의존한다. 관계는 스크린을 통해 이룬다. 문명은 인간을 극도의 편리 주의로 몰아가고, 편리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느끼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부른다. 문명이 노동을 대체했는데, 인간 내면의 능력도 대체하고 있는 셈이다. 한마디로, 문명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발전하겠지만, 사람이 '더 나은 인간이 된다'라는 보장은 없다.


스티븐 호킹(1942~2018) 박사의 가설들도 문명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21세에 '루게릭병'이라는 불치병을 진단받고 76세에 죽기까지, 천재적인 두뇌 활동으로 세계인들의 추앙을 받았다. 다른 영역이 닫혔으므로, 오직 한 부분만의 추론이 우리가 아는 그를 만들지 않았을까. 거기에, 블랙홀도 사라질 수 있다, 하나의 점에서 우주가 시작되었다, 우주에는 경계가 없다,라는 신체 조건을 이겨낸 그의 신선한 이론현대인들은 아낌없이 갈채를 보냈다. 그래서였을까. 호킹은 처음엔 신의 존재에 대하여 열어두었다. 결국에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무신론자로 남았다. 그는 신이 준 자기의 천재성을 신의 자리에 앉는 것으로 대신한 것이다. 19세기 문명이 니체를 낳았다면, 20세기 문명의 극치는 스티븐 호킹이 아닐까? 하지만 그의 이론들은 가설이다. 그의 생각일 뿐이다. 검증되지 않았다.


우리 곁에는 문명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부모 세대이다. 문명 대한만국을 일군 사람들이요, 왕성한 두뇌활동으로 문명을 이루도록 노동으로 자녀교육을 확장시킨 장본인들이다.

한 여자 어른이 박스를 손수레에 가득 싣고 큰길을 건넜다. 엉성하게 높이 쌓았으므로 위태로웠다. 아니나 다를까, 거의 다 길을 건넜을 때, 박스들이 무너져 흩어졌다. 어른이 화들짝 놀라 멈춰, 다시 박스를 주섬주섬 주워 올렸다.

다른 남자 어른이 헌 물건들을 길목에 내놓았다가, 저녁이 되니 다시 거두었다. 물건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이 버린 재활용품들이었다. 물건의 가치로 봐서는 판매할 것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어른은 하루도 빠짐없이 물건을 길에 내놓았다가 거둬들인다. 혹시나 찾아올 그 한 사람을 기다리며.


결론적으로, 위의 두 어른의 노동에 대한 대가는 지극히 적다. 하지만 노동의 가치는 적지 않다. 현대 문명이 부지런함을 앗아가고 편리가 사람을 둔화시켰어도, 두 어른은 각기 자기 세대의 부지런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까닭이다. 한 세대 후에는 두 어른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다음 세대인 나를 비롯한 문명인들이 노숙자로 전락할지언정 그런 부지런함을 잊었으니까. 편리를 따르다 보니 버리는 일에는 익숙하나, 몸을 움직이는 일에는 서투니까. 그때 다른 대체 노동이 있을까? 해보지 않았으니 어찌 노동하랴! 국가가 던져주는 복지금 몇 푼에 목숨 걸고 앉아 있지는 않을까!


성경의 현숙한 사람(여인-잠언 31장)은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한다.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자기 집안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며, 여종들에게 일을 정하여 맡긴다. 밭을 살펴보고 사며, 자기의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일구고, 허리를 단단히 동여맨 후, 억센 팔로 일한다. 밤에도 등불을 끄지 않고, 한 손으로는 물레질을 하고, 다른 손으로는 실을 탄다. 바로 한 세대 전 우리 부모들의 모습이다. 거기에는 경쟁 아닌 평화가 있었다. 노숙자들도 없었다. 환경 파괴와 불평등도 크지 않았다. 문명은 없었지만 마을 공동체가 있었다. 부자가 가난한 이들을 먹였다.


문명이 사람을 아프고, 힘들게 한다.(롬 8:22) 첨단 문명이 사람을 무신론으로 이끈다. 여러분이여, 문명의 근원인 절대자를 보라. 문명을 만드는 인간 두뇌의 근원, 창조자를 보라. 피조된 내가 어찌 창조의 자리에 앉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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