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슬픈 외국어 : 달라진 국격과 닫혀있던 내 마음 얘기
예전부터 남자들끼리 흔히 하던 얘기가 있었다. 외국(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외국이란 미주, 유럽 등 주로 백인을 떠올리게 되는 그런 나라들.. 예전에는 백인 = 미국 사람이라는 이상한 생각들도 참 많았다.)에 가면 동양 남자는 동네 개 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다는 그런 자조 섞인 농담 말이다. 동양 여자는 상대적으로 친절한 대우를 받는다는 그런 질투심(?) 어린 못난 한국 남자들의 얘기였다.
군 제대 후 2002년에 아르바이트하며 알뜰살뜰 모은 돈으로 당시 대학생들이라면 응당 필수코스라고 여겨졌던 '어학연수'를 갔다. 같은 돈으로 체류 기간을 늘리기 위해 영어권 중 상대적으로 저렴했던(?) 뉴질랜드에 갔었다. 당시만 해도 어디 가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못 알아듣고, '노스 코리아'를 얘기해야 '아~'하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삼성, 현대 얘기해봤자 '그거 중국 브랜드 아니었어?'의 반응은 당연사, 길거리에서나 여행을 가거나 가장 먼저 접하는 질문은 중국인이냐 아니라고 하면 일본인이냐 였고, 아니라고 하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잉 그럼 뭐야?'라는 느낌이었다.
취업 후 여행, 출장 등으로 유럽, 미국 등 수많은 영어권 국가를 다녀봤지만, 대체적인 느낌은 비슷했다. 그만큼 한국이란 나라, 그 나라의 문화, 음식 등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도 없었고, 상대적으로 국가 브랜드, 문화, 음식 등에 대해 인지도나 선호도 면에서는 단연 '일본'이 압도적이었다. '아니메'라고 불리는 일본 만화, 스시, 라멘으로 대표되는 음식의 인기 등이다. 뻔한 얘기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누구 하나의 덕분이라기보다는, BTS를 중심으로 한 K팝 열기, 오징어 게임, 기생충을 중심으로 한 K콘텐츠, 갤럭시 폰, 현대자동차 등의 K 브랜드 등... 어디를 가도 한국이라고 하면 환영받고, 현지인 10대 들에게 사진을 찍히는 진기한 경험을 하게 되는 그런 시대가 왔다. 유명 여행 유튜버들의 최근 콘텐츠를 보면 어디를 가나 인기남(?)이 되고, 아무렇지 않게 한국말 인사를 전하는 현지인들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미국에 오면서 처음에는 나도 모르게 긴장했다. 그동안 경험했던 수많았던 그 무시와 백인들의 불친절함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마음을 굳게 닫고 있었다. 2년여간의 팬데믹 상황 속에서 20대 이후 처음으로 2년 가까이 비행기 한번 못 타본 상황인지라 더 그런 면도 있었을 것이다. 여행 유튜버들이 겪는 일은 연출된 것이 아닌 현실이었다. 미주리주 Target 마트에서 내 한국 여권을 보고 '자기는 무조건 한국에 음식 먹으러 여행 갈 거라고' 안 물어봤는데 먼저 얘기해주며 반가워했던 캐셔도 있었고, 우버 기사나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오징어 게임' 등을 언급하며 '안녕하세요'를 시전 하기도 한다. 심지어 동네 시니어들이 주 고객인 브런치 집에서 'Korean Street Style Toast'를 발견하곤 헛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래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수십년 넘은 동네 브런치 가게 메뉴에서 발견한 '한국 길거리 토스트']
무라카미 하루키는 수필집 '슬픈 외국어'에서 외국 생활하면서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를 해야 하는 생활 속에서 무언가 슬픈 느낌이 든다고 표현했는데, 아마 해외 생활해본 사람들은 어느 정도 공감할 표현이었고, 나도 멕시코, 필리핀 주재원 생활하면서 문득 비슷한 느낌이 들어 그런날에는 집에 와서 일부러 한인마트에서 사 온 '소주'를 마시고, 한국 발라드 음악을 들으면서 그 서글픈 느낌을 달래본 기억이 많다. 한국에서의 뭔지 모를 그 '빡빡함', 남들과의 끊임없는 비교와 경쟁이 숨 막혀서 선택한 외국생활이지만, 그래도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를 사용하며 살아가는 생활에는 어딘지 모를 그 '슬픔'이 서려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브랜드 파워는 지금 어찌 보면 역사상 최고 수준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 해외생활 시작하는 거는 운이 좋다고도 할 수 있지만, 문제는 내 마음속에 있지 않았나 싶다. '미국에 가면 이럴 것이다'를 기존 경험을 토대로 미리 단정 짓고 기대감을 내려놓은 면도 있었던 거 같다. Social Security Number 신청할때도 가기 전부터 그랬다. 그들의 고압적인 자세나 느린 처리속도를 예상하고, 스스로 마음을 내려놓고 갔는데, 의외로 훨씬 체계적이고, 나를 상대해주는 공무원(?) 분도 상당히 친절하고, 열정을 다해주어서 놀랐다. 이런 걸 보면 나 스스로 얼마나 마음을 닫았나 싶기도 하다. 현상도 현상이지만, 결국 내 마음의 준비상태가 중요한 어찌 보면 상호작용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줄은 조금 섰지만 친절하고 처리가 빨랐던 Social Security Service Office]
*소심한 에피소드 하나 추가하자면, 커튼을 구매하러 간 매장의 캐셔 아주머니가 너무 불친절하고 물론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갓 뎀'을 외치기까지 해서 '역시나' 하는 마음이었는데, 다른 물건 구매하러 다시 들렀더니 다른 백인 손님에게도 똑같이 하는 걸 보고 속으로 안심(?)했던 적도 있다.
(다음 회에서 계속)
*표지설명: 미국에 와서 거의 하루도 안빠지고 아이와 처제 아이와 낚시를 다니고 있다. 스팟도 많고 잘 잡혀서 아이들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환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