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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떡국

by 디디온

백석도서관 못 미처 정혜사란 절이 있다. 후앙과 파리바게트를 비롯해 여러 가게가 즐비한 복잡한 도심 한가운데 기와를 얹은 제법 큰 절을 지날 때마다 그 안의 풍경이 궁금했다. 정혜사란 이름의 절은 여럿 있다. 전주에 있는 정혜사는 비구니 사찰이라고 하는데, 얼마 전 본 ‘도쿄 사기꾼들’이란 넷플릭스 드라마 장면이 떠올랐다. 부동산 사기업계 최고 고수들이 벌이는 드라마틱한 사건을 다루는 이 드라마에는 파격적인 비구니의 정사신이 들어 있다. 중생의 고뇌를 덜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절을 지나면서 그런 불경한 장면을 떠올리는 것을 부처님은 달갑게 생각하지 않겠지.


정혜사를 지나 백석역 근처로 가는 골목길에는 음식점 간판이 울긋불긋 꽃대궐을 이루었다. 간판의 이름을 살피며 걷는 일은 지루함을 덜어준다. ‘우리지금만나’ ‘카츠오젠’ ‘이자카야 오월하루’ ‘회애반하다’ 등 눈을 잡아끄는 간판을 읽으며 걷다, ‘윤선이네’라는 이름에서 멈춰 섰다. 윤선이라니.

세련된 외식문화 세계의 진입을 알리는 음식점 간판 사이에서, ‘윤선이네’는 컨츄리한 스타일의 이름처럼 찌개 전문 음식점이었다. 김치찌개 참치찌개 꽁치찌개 조기찌개 오징어찌개 등등. 후배 ‘윤선’이가 생각났다. 똑똑하고 당찼던 윤선이. 결혼한 뒤 유학 가는 남편을 따라갔다 미국에서 교수가 된 윤선이. 그사이 딸이 태어났는데 둘은 이혼을 하고 윤선이는 혼자서 딸을 키우고 있다.

‘윤선이네’를 지나 걷는데 도로 가장자리에 주차된 차들 밑에 붉은색 등이 보인다. 붉은 카스토퍼였다. 주차된 차가 없는 곳에는 푸른 카스토퍼가 보인다. ‘노상공영주차장 바닥제어 시스템 이용 안내’ 간판에, 카스토퍼에 대한 안내와 주차요금 안내가 쓰여 있다.

경비 모자를 쓰고 길가에서 주차 요금을 받던 어르신 대신 붉어졌다 푸르러졌다 변하는 카스토퍼. 주차요금을 내지 않은 차 밑에 있는 붉은 카스토퍼는 우뚝 솟아 있다. 돈을 내지 않으면 차는 카스토퍼에 걸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참으로 편리한 시스템이지만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차 밑에서 번쩍거리는 붉은 카스토퍼가 보이자 갑자기 떡국이 생각났다. 얼마전 이웃 언니를 만났는데 혼자 식당에 갔다 갑자기 떡국이 먹고 싶어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며 떡국을 먹었다고 한다. 더위를 많이 타는 언니답지 않은 결정이었다. 붉은 카스토퍼에 밀려난 주차요금 어르신처럼, 더위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에서 밀려난 떡국에 대한 연민이라도 생겼던 것일까.


떡국의 전성기는 겨울이고, 한여름 떡국은 찬밥 신세이다. 이렇게 무더운 날 냉면을 먹고 싶지,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지, 매콤한 비빔면을 먹고 싶지, 누가 질퍽한 떡국을 입에 담고 싶겠는가. 여름에 떡국은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다. 여름 떡국은 중심에서 밀려난 서러운 음식이다.

백석역 근처를 지나자 ‘왕순이 김밥집’ 메뉴 맨 끝자락에 초라하게 자리 잡은 메뉴가 눈에 들어온다. ‘떡국’. 누가 여름에 떡국을 찾겠는가. 누가 여름에 떡국에 눈길을 주겠는가. 나라도 오늘 더운 여름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떡국을 먹으며, 중심에서 밀려난 것들에 대해 따뜻한 눈길 한번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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