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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황무지

이십 대 나의 황무지를 간직해 준 후배에게

by 디디온

한겨레문화센터에서 목판화를 배운 적이 있다. ‘판화로 시를 쓴다’는 평을 받으며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이철수 판화가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다.

초보자에게 목판화를 만드는 일은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이었다. 작품을 조각할 나무를 구하는 일부터 나무에 밑그림을 그려 넣은 다음 조각도를 이용하여 나무를 깎은 뒤 물감을 묻혀 한지에 찍어내는 과정은 어느 하나 쉽게 되는 것이 없었다. 쉽지 않은 않았지만 목판화 만드는 과정은 재미있었고,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목판에 그려진 밑그림을 뾰족하거나 둥근 조각도로 파내고 다듬으며 그림을 완성시켜 나갈 때는, 세상 모든 일을 잊고 몰입할 수 있었다. 몰입은 나를 평온하게 만들었다.


그 시절 만든 목판화가 아직 두 점 세상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얼마 전 일이다. 첫 직장에서 만나 이제껏 인연을 이어오는 후배가 서른 무렵 선물한 목판화를 아직 간직하고 있었다. 후배에게 목판화를 준 사실도 기억하지 못했는데, 놀랍고 고마웠다. 이십 대 치기 어린 시절의 목판화는 다시 나의 손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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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LLIE HOLIDAY_ AT JAZZ AT THE PHILHARMONIC”이란 타이틀이 붙은 CD는 1946년 카네기홀의 라이브 공연을 담고 있다. 미국의 음악잡지 ‘Down Beat’는 이 앨범에 대해 “이보다 매력적인 빌리 홀리데이의 목소리는 없을 것이다”는 찬사를 보냈지만, CD의 노래에는 깊은 슬픔과 탄식 그리고 사랑에 대한 갈망이 담겨 있다.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외투, 술병이 있는 방 한가운데 벌거벗은 여자가 침대에 기대어 울고 있는 CD 쟈켓은 강렬하게 마음을 끌었다. 8곡의 노래 가운데 7곡은 아마도 그녀 인생 자체였을 사랑에 대한 파열음과 갈망이, 그리고 <Strange Fruit>에는 흑인 인종차별에 대한 강렬한 비유가 담겨 있다. 노래들은 빌리 홀리데이 인생의 ‘body’와 ‘soul’로 구성되어 있다.

찰리 파커, 빌리 홀리데이, 디지 길레스피의 재즈 앨범을 디자인했던 데이비드 스톤 마틴이 재킷 일러스트를 디자인했다. CD 쟈켓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스톤 마틴의 일러스트를 저작권 허락도 받지 않고 없이 마음대로 도용(!)한 뒤 목판화로 만들어 작품 한 귀퉁이에 ‘내 마음의 황무지’란 제목을 써넣었다. 산울림의 ‘내 마음은 황무지’를 떠올리며 붙인 ‘내 마음의 황무지’라는 작품명은 싱싱해야 좋았을 시절 마음을 앓던 나에게 건네는 위로였다.


황무지를 건너 이곳까지 도착했다. 푸릇하고 부드러운 잔디밭을 걸으며 오래전 건너온 마음의 황무지를 떠올려본다. 젊은 날 위험했던 나의 황무지. 어긋나던 관계 속에서 외롭고 막막했던 그 시절 만났던 후배는 나를 이해해주고 받아주었다. 그의 손을 잡고 혼란스러웠던 젊음의 황무지를 간신히 건너왔다.

25여 년이 지나 다시 듣는 빌리 홀리데이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사랑에 대한 갈망을 끌어내어 보여준다. 영화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에서 파란 텐트의 철학자로 나오는 이마무라 쇼헤이는 “욕망에 충실한 게 진짜 삶”이라고 말한다. 공자는 《논어》 위정(爲政) 편에서 “70세에, 마음이 욕망하는 대로 해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었다.”(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고 말한다. 행복하고 충만하게 삶을 마무리하는 방법을 앞서간 이 두 분의 말에서 찾아보고 싶다.


IMG_7822.jpeg 1946년 카네기홀 공연을 담은 빌리 홀리데이의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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