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의 말들》을 남기고 떠나다
역사문제연구소 첫 외국인 연구실장 후지이 다케시는 한국 현대사를 연구한 일본인이다. 교토대 사학과 시절 재일조선인 인권운동을 하던 그는 졸업논문으로〈경성제국대학〉을, 석사 논문으로〈대한민국 초기 반공체제 형성 과정 연구〉를 썼으며 성균관대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후지이 다케시는 한국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주요 언론사에 칼럼을 연재하는 등 연구자로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후지이 다케시를 알게 된 것은 지금은 사라진 신촌에 있던 사회과학서점 ‘오늘의 책’에서였다. 나는 ‘오늘의 책’ 단골손님이었고, 당시 연대 어학당에서 한국어 어학연수 중이던 후지이 다케시 역시 ‘오늘의 책’ 단골손님이었다. 단골손님끼리 서점에서 계속 만나 인사를 하다 일본어 공부하는 모임이 생겨 후지이 다케시와 연을 이어갔다. 일본어 공부가 끝나면 같이 근처 술집에서 자주 술을 마셨는데 후지이 다케시에게는 매우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일본의 명문 교토대를 나온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언어 감각은 남달랐다. 내가 다케시를 만났을 때 그는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말이 능숙하지 않았다. 헌대 그의 언어습득 속도는 광속처럼 빨랐다. 게다가 ‘책 중독자’인 그는 무척이나 많은 책을 섭렵하면서 한국 사람도 잘 모르는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한국어들을 알아가며 자신의 이국 언어감각을 풍성하게 만들어갔다. 그냥 언어만 익히는 게 아니라 한국이라는 사회 깊숙한 곳에 자리한 정서와 그를 바탕으로 한 문화와 역사를 깊게 이해했다.
한번은 신촌의 ‘판잣집’이란 막걸리 집에서 술을 마시다 흥겨워져 노래판이 벌어졌는데 그가 부른 노래는 ‘오월의 노래’. 광주항쟁의 참상을 담은 노래를 일본 사람이 부른다는 사실에 모두 어이없어하며 놀랐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일본만화책 스터디가 끝난 뒤에도 한 차례 더 다케시와 일본어 책을 읽는 모임을 가졌다. 그때 일본어 원서로 읽은 책이 《子どもの淚(아이의 눈물》. 고국으로 유학을 왔다 간첩으로 몰려 오랜 세월 옥살이를 한 서승 형제의 동생 서경식이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쓴 책이다. 그 책을 일본어 원서로 다케시와 함께 읽는 시간은 매우 즐거웠다. 풍부한 지적세계에 초대된 느낌으로 일본어를 배웠다. 내가 일본어가 매력적이라고 느끼게 된 것은 모두 다케시와 함께 한 시간 덕이다.
그 뒤 다케시와 아는 후배가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오랫동안 그의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우연히 잠깐 마주치긴 했지만 서로의 삶의 반경이 너무 달라 만남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어느 날 다케시가 쓴《무명의 말들》이란 책에 대한 서평을 접하고서는 깜짝 놀랐다.
3년 넘게 한 신문사에 칼럼을 연재하였는데 “깊이 있는 시선과 날카로운 문장”이라며 그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엮어《무명의 말들》이란 책을 펴냈다. 내가 일본어 공부를 하면서 만난 다케시도 ‘깊이 있는 시선과 날카로운 안목’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런데 다케시에게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들이 있었던지 책이 출간되기 전 그는 20년간의 한국 생활을 접고 일본으로 갔다는 것이다.
한 역사학자는 “후지이는 아까운 연구자다. 그는 ‘국민’의 틀을 넘어선 눈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봤다. 한국에서는 드문 시각이었고 그래서 더 소중했다.”라고 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을 방법이 지금으로선 없다. 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 그렇다면 헤어지면 다시 만나지 않겠는가. 다시 만나면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다. 철없던 시절 만났기에 깊이를 제대로 가늠할 수 없어 알 수 없었던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담긴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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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의 이쪽이 밝고 저쪽이 어두우면 밝은 쪽은 나를 반사하는 거울이 된다. 유리창 너머의 다른 존재를 보기 위해서는 이쪽의 불을 끄면 된다. 처음엔 깜깜하겠지만 차츰 반대쪽의 모습이 나타난다. 어떤 운동을 하려면 불을 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쓸데없이 빛을 많이 받았다. 나는 지금 불을 끈 채로 나를 바라보고 나의 너머에 있는 다른 세계가 보이길 기다리고 있다.
_후지이 다케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