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진리

짜장면 한 그릇에 담긴 철학

by 디디온

오후 늦은 시간이면 동네 산책을 나간다. 나의 산책 코스는 아파트 단지 사이사이에 조성된 숲길인데, 특히 내가 좋아하는 길은 마두역 뒤 강촌 동아아파트와 백마 삼성아파트 사이에 난 숲길이다. ‘제4회 대한민국 조경 대상’을 받은 이 길은 대원각이라는 요정에서 절로 변신한 길상사의 살짝 굽이치는 길처럼, 길상사 입구에 놓인 최종태 조각가의 ‘관세음보살상’처럼 부드러운 곡선으로 되어 있어 걸을 때마다 그 아름다움과 싱그러움에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나에게는 이 길이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그 유명한 ‘철학자의 길’ 못지않은 나만의 ‘철학자의 길’이다.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철학자의 길’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적을 두고 공부하던 철학자들이 산책을 하던 곳으로, 칸트를 비롯하여 하이데거, 헤겔, 야스퍼스 등의 철학자가 걸으며 사색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철학자가 아닌 사람들도 길을 걸으면서 사색에 잠기면 마치 철학가가 된 것처럼 인생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된다고 해서 ‘철학자의 길’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백석동 ‘철학자의 길’을 걸으면 어지럽던 마음이 정돈되고, 불현듯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얽히고설킨 현실의 문제를 풀어낼 단서가 생각나기도 한다. 오늘도 나는 나만의 ‘철학자의 길’을 걸으며 복잡한 머리를 비우고 마음의 근육을 키운다.


어느 날인가 나의 ‘철학자의 길’ 코스 끝에 있는 마두역 뒷골목을 걸어가다 ‘대박각’이란 짜장면 집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았다. 가게가 아주 작았다. 안을 들여다보니 ㄱ자로 된 목로에 의자가 8~9개 다닥다닥 붙어 있다. 마침 배도 출출한 때라 긴 줄 마지막에서 기다렸다가 가게 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자 바로 앞에 이런 글이 담긴 종이가 붙어 있었다.



어릴 적 처음 맛봤던 중화요리의 신세계, 그 잊지 못할 추억을 구현하고

‘신선한 재료를 정직하게 만들면 맛있다’라는 그 당연한 진리를 실현하고자

대박각을 오픈했습니다.



짜장면 집에 붙어있는 이 짧은 글에서 좋은 시나 소설을 읽었을 때 못지않은 감동을 받았다. 이런 가게를 찾는 게 얼마나 힘든 세상인가. 음식점에서 ‘신선한 재료’를 ‘정직’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가 당연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문을 넣으면 그제야 면을 뽑고 고기를 튀기고 재료를 볶기 때문에 한참 기다린 후에야 짜장면이 나왔다. 탄산나트륨을 잔뜩 넣어 다 먹을 때까지 전혀 불지 않는 냉정한 면발과 미끌미끌 대강 만든 짜장 소스가 얹혀 있는 짜장면이 아니었다. MSG 범벅으로 혀를 기만하는 짜장면이 아니었다. 짜파게티보다 못한 짜장면이 아니었다.


‘당연한 진리’가 실현된 짜장면의 맛은 깊었고 맛있었다. 신선한 돼지고기, 양파를 잘 볶아 구수한 향이 진하게 느껴지는 짜장 소스. 대박각을 차린 주인장도 아마 이 짜장면처럼 깊은 사람일 것이다. 대구 중식당 무열회관에서 셰프로서 이력을 시작한 대박각 대표는 호텔 중식당 주방장을 거쳐 2년 전 일산 마두동에 대박각을 차렸다. 메뉴는 간짜장, 짬뽕, 탕수육 세 가지, 일하는 사람도 세 사람이다.


일산에 대박각이 있는 한 짜장면을 먹는 나는 늘 행복할 것이다.


tmi _ 대박각 간짜장에는 ‘달걀 프라이’가 곁들어 나온다. 황금빛 황소의 선한 눈망울 같은 노른자와 갓 튀긴 계란 흰자가 울퉁불퉁 요철처럼 튀어나온 달걀 프라이. 간짜장에 달걀 프라이가 나오지 않으면 섭섭한 부산 사람들에게 반가운 정보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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