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우리의 계획과는 별도로 그냥 일어나는 일이다
런던 내셔널갤러리에 있는 ‘제인 그레이의 처형’은 폴 들라로슈의 그림으로, 폴 들라로슈는 주로 역사적 장면을 화폭에 그렸던 프랑스 화가이다. ‘심문받는 잔 다르크’ ‘잉글랜드 여왕 앨리자베스 1세의 죽음’ 등 그의 작품은 대부분 프랑스와 영국의 역사적 인물을 그리고 있다.
‘제인 그레이의 처형’은 런던에 가기 전 시공사에서 나온 내셔널갤러리에 관한 책에서 보았는데, 직접 가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그림이 컸다. 수많은 명화들이 현란하게 눈을 사로잡는 내셔널갤러리에서 나는 왜 하필 잘 알려지지 않았고 명화도 아닌 ‘제인 그레이의 처형’에 그토록 눈길을 거둘 수 없었는지. 그림을 보고 난 후 런던 퍼트니에서 1년 넘게 지내는 동안 울적한 기분이 들 때는 오직 그 그림을 보기 위해 내셔널갤러리에 갔다. 그리고 그 그림만 보고 돌아왔다.
내가 그때 기억한 그림의 제목은 ‘제인 그레이의 사형집행’이었는데 최근 다시 찾아보니 ‘제인 그레이의 처형’으로 나온다. 그림을 다시 보니 뭔가 작위적인 느낌, 연극적으로 꾸민 느낌이 강하게 풍겨온다. 소위 ‘명화’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 것이다. 폴 들라로슈의 그림들이 전부 그렇다. 그 가운데서 ‘제인 그레이의 처형’이 가장 인기를 끌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 나는 왜 이 그림에 끌렸을까.
눈부신 드레스를 입은 앳된 여왕이 눈을 가린 채 단두대를 앞에 두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서 참담함과 어찌할 수 없는 잔인한 운명의 손길이 느껴진다. 극적인 대비. 그때 나는 무엇에 그렇게 절망했기에 이 그림에 감정이 깊게 이입되었던 것일까.
잉글랜드 튜더 왕조의 여왕인 제인 그레이는 영국 최초의 여왕이지만, 여왕 자리에 있었던 것은 1553년 7월 10일부터 7월 19일까지, 단 10일이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총명한 머리를 가졌지만 그녀의 짧은 인생은 ‘불행의 종합세트’처럼 보일 정도로 안타까운 일들의 연속이었다. 불운이 불행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불굴의 의지로 인생을 헤쳐나가는 여인들의 이야기도 있지만 제인 그레이가 살았던 시대나 그녀의 배경은 그런 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왕 자리에 오른 것도 자신의 뜻이 아니었으며, 런던탑에 갇힌 후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에 이른 것도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제인 그레이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는 말을 했던 제인 그레이는 처형될 때 ‘힘든 인생이 끝나 평화를 누리게 되어 기쁘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때 제인 그레이의 나이는 고작 1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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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너무나 가련한 인간이었나이다. 수많은 문학 작품을 읽고, 그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그토록 불쌍하게 여겼으나 내 자신이 얼마나 가여운 인간인지는 깨닫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_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