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클린의 눈물

자클린 뒤 프레를 기억하며

by 디디온

‘자클린의 눈물’은 독일 태생의 프랑스 작곡가 자크 오펜바흐가 만든 곡이다. 미발표 악보였던 이 곡을 독일 첼리스트 토마스 베르너가 발굴하여 ‘자클린의 눈물’이란 제목으로 연주하였다. 토마스 베르너가 이 곡에 ‘자클린의 눈물’이란 이름을 붙인 이유는 42세의 나이로 요절한 자클린 뒤 프레(Jacqueline Du Pre)를 기리기 위해서였다.


“겉모습은 수줍음을 타는 귀여운 목장 아가씨 같지만, 첼로만 손에 들면 신들린 모습이었다”


20대 초반 천부적인 재능으로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스타가 된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를 아는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 한 말이다. 1962년 BBC 교향악단과 협연한 ‘엘가의 첼로협주곡’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자클린만의 독보적인 매력을 뿜어내는 불멸의 연주로 손꼽힌다.


스물두 살, 첼로만 알았던 수줍음 많은 처녀는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집안의 반대를 물리치고 결혼한다. 결혼 후 자클린 뒤 프레와 바렌보임은 환상적인 커플임을 입증이라도 하듯 세계 무대를 누비며 연주활동을 했으며, 두 사람이 함께 연주한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 송어’ 등은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뛰어나다는 찬사를 받았다.


여기까지가 자클린 뒤 프레의 ‘빛’이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 없는 빛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억압하며 살아왔던 자클린 뒤 프레에게 ‘첼로’는 밖으로 표출되지 못한 자신의 고통과 열정, 분노를 표출하는 도구였다. 뒤 프레의 첼로 연주가 그토록 청중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첼로를 연주할 때만이 그녀에게 억압했던 감정들이 ‘소리’란 형태로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는 이러한 자클린 뒤 프레의 연주에 대해, 그녀의 연주를 듣는 일은 그토록 매혹적이면서도 고통스러웠고 거의 두렵기까지 했다고 고백한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 자리에서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하는 도중 첼로 현이 끊어지는 비상사태가 발생하자 곧바로 현을 바꾸고 연주를 이어나갈 정도로 무대에서는 대담했고 눈부신 재능을 발휘했지만, 사랑이 파국으로 치달을 때 자클린에게는 그것을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던 듯하다. 다발성경화증이란 병은 그녀의 조율되지 못한 내면세계와 무관한 것은 아닐 것이다.


“재키의 인격 속 넓은 공간은 첼로 연주를 통하는 것 말고는 표현할 기회를 거의 잡지 못했다.”


첼로만이 자신의 내면을 표현할 유일한 목소리, 자신의 어두운 심연 깊이 자리한 감정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는 수단이었지만, 첼로 자체가 그녀 내면의 깊은 어둠을 극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재능이 피워낸 불꽃에 스스로 타버릴 수밖에 없었던 그녀 불행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20대 초반 세계적인 스타 첼리스트가 되고 28세 다발성경화증으로 무대에서 은퇴한 뒤 15년을 병마와 싸운 비운의 스타. 짧은 활동 기간에도 강렬한 연주로 청중을 사로잡은 그녀의 묘비에는 ‘다렌보임이 사랑했던 아내’라고 쓰여 있다. 다렌보임과의 결혼생활에서 보여주었던 둘의 불화를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묘비명이다.


클래식 음악이 많이 등장했던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 삽입되기도 했던 ‘자클린의 눈물’은 언제나 듣는 이의 마음을 부서지게 만든다. 그토록 뛰어난 재능과 불행을 함께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첼로가 자신의 행복이자 불행이었던 불세출의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를 생각하며 ‘자클린의 눈물’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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