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인간에게는 아름다운 녹봉이 아니겠는가?
지난겨울 서촌에 있는 주점 서촌가락에서 대학 동아리 후배들을 만났다. ‘서촌가락’을 약속장소로 점지한 후배는 술을 잘하지는 못하지만 술의 맛에 대한 호기심이 있고 음식에 대한 감각도 빼어나다. 겨울비가 내려 운치 있던 그날 조그마한 서촌가락 내부는 정겹고 따스했다. 사람들은 모두 술잔을 앞에 두고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으면서 이야기하며 취해갔다.
도토리묵, 해물파전, 두부김치, 명태초무침 등의 ‘다정한 술동무들’ 메뉴도 정겨웠지만 메뉴 옆에 적힌 다양한 막걸리 목록을 보고 반했다. 송명섭막걸리를 비롯하여 부산 금정산성막걸리, 해창 막걸리, 이화백주에서 풍정사계까지 일반 주점에서는 만나기 힘든 술의 목록이었다. 아아, 막걸리계의 에르메스 ‘복순도가’까지.
복순도가를 처음 맛본 순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학처럼 우아하고 긴 병에 담긴 복순도가는 외모부터 남달랐고, 병뚜껑을 따는 것도 최대한 병을 기울인 다음 탄산이 올라와 빠져나가게 한 다음 천천히 병뚜껑을 열어야 했다. 귀부인 모시듯 병뚜껑을 딴 다음 맛본 복순도가는 ‘격’이 있는 막걸리였다. 사실 막걸리와 ‘격’은 좀 거리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복순도가는 도도한 눈빛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얘, 막걸리들아, 난 너희들과는 달라, 품격이 있는 막걸리, 샴페인 같은 막걸리라고!
막걸리 이야기를 하면서 다랭이팜 막걸리를 지나칠 수는 없다. 다랭이팜 막걸리를 애정하며 마신 지 거의 10여 년이 되어간다. 처음 다랭이팜 막걸리를 마신 순간 너무 신맛이 강해 놀랐던 기억이 또렷하다. 흑미로 만든 6도짜리 다랭이팜 막걸리였다. 자줏빛이 도는 게 특이하고 예뻐 보여 먼저 맛을 보았는데, 너무 시어서 맛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한참 지나 다시 마셨더니 처음 마셨을 때의 끔찍한 ‘신맛’이 맛있게 느껴지더니 점점 마실수록 ‘신맛’의 매혹에 빠져든 것이다.
막걸리 특성상 시간이 지날수록 숙성되어 신맛이 완화된 탓도 있을 테지만, 다랭이팜 막걸리를 마실수록 ‘신맛’은 신묘하게 ‘신선한’ 맛으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신맛’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막걸리는 시간과 함께 숙성되면서 하루하루 맛의 디테일이 달라진다. 깊어지고 숙성되다 못해 꼬부라진 할망구처럼 시어버린 다랭이팜 막걸리를 마신 적도 있는데, 이게 또 나름 별미 같은 새로운 맛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 한 번에 두 박스 그러니까 18병의 막걸리를 주문해 냉장고에 쟁여두고 마시다 보니, 다양한 스펙트럼의 막걸리 맛을 맛보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다랭이팜 막걸리는 경남 남해 다랭이마을에 있는 농업회사법인 다랭이팜에서 만든다. 바닷가 언덕을 따라 물결무늬를 그리며 만들어진 다랭이논에서 재배한 유기농 현미와 토종 앉은뱅이밀 누룩과 암반수로 만든 다랭이팜 생막걸리는 아스파탐 등 합성감미료를 사용하지 않고 달지 않아 술꾼을 위한 막걸리이다. 막걸리계에서 유명한 송명섭막걸리나 복순도가처럼 유명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진심을 담아 만든 막걸리, 숨어 있는 소박한 명품 막걸리이다.
그날 서촌가락에서 우리는 파전에 송명섭막걸리를 마셨다. 그 명성을 말로만 들었는데 직접 시음해 보니 달지 않아 좋았지만 늘 마시는 다랭이팜 막걸리보다 좀 싱거웠다. 서촌가락 술 냉장고에 고아하게 앉아 있던 ‘풍정사계’를 마시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웠다.
‘풍정사계’는 각별한 기억이 있는 술이다. 바로 ‘풍정사계’란 술 이름 글씨를 쓴 강병인 씨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표 캘리그래퍼 강병인을 서촌 술자리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지리산에서 막 내려오신 도인 같은 모습이었다. 그날 애주가인 캘리그래퍼는 술을 옆에 끼고 오셔서 맛보게 해 주었는데 그 술이 바로 ‘풍정사계 춘’이었고, ‘풍정사계’란 글씨는 강병인 씨 작품이었다.
내용과 형식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형식은 곧 내용과 연결되며 내용은 형식으로 표현된다. 그런 의미에서 ‘풍정사계’는 술병의 디자인과 그 안의 내용인 술이 함께 어우러지며 ‘품격 있는’ 술의 맛을 함께 만들어낸다.
그날 강병인 작가로부터 명함을 한 장 받았는데, 명함이 너무 멋스러워 아직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한글의 캘리그래피의 개척자인 강병인 씨는 서울의밤, 화요, 산사춘 등의 술브랜드를 비롯하여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 영화 ‘의형제’ 등 여러 방면에서 캘리그래피 작업을 한다. 작업실 이름을 ‘술통’으로 짓는 등 술에 대한 각별한 사랑 때문에 그의 술 브랜드 글씨는 더 독창적이고 매력적이다.
그날 우리는 서촌가락에서 나와 ‘불러도’란 음악카페에서 맥주를 마셨다. 우리가 앉은 테이블 옆 작은 창문으로 겨울비가 내렸고, 장필순을 닮은 카페 여주인이 내주는 안주와 술을 마시며 다가올 겨울을 위한 따뜻한 난로를 마음속에 들여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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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이제 어린 나이에 술잔을 기울이니
조만간 창자가 썩을까 두려워라
네 아비 늘 취한 것 배우지 마라
한평생 남들이 미치광이라 말한단다
한평생 몸 망친 게 모두가 술 탓인데
네가 술 좋아하니 이를 또 어이할꼬
삼백이라 이름 지은 것 이제야 후회하니
날마다 삼백 잔을 마실까 두렵구나
*술이 인간에게는 아름다운 녹봉이 아니겠는가? _ 고종 시절 진주목사와 김해부사를 지낸 정현석은 조선 시대 말기(1865년) 교방(敎坊)에서 불리던 기생의 노래·춤에 대해 기술한 책《교방가요》를 썼는데, 그 가운데 ‘권주가’에 나오는 구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