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노를 든 신부」)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는 왜 그녀의 발에만 들어맞았을까? 어릴 적, 내 신발이 동급생 친구의 발에도 쏙 들어가는 걸 보고 적이 실망하였었다. 누구나 신을 수 있는 신발을 신는, 특별함이라곤 전혀 없는 ‘나’라는 아이가 동화 속 공주처럼 신발을 읽어버린들 왕자가 그게 내 것이라고 알아봐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어린 나를 매우 절망케 하였다.
구두 한 짝으로 간택된 공주 이야기는 전래동화의 전형적 특성인 여성의 수동성을 나타낸다. 시대착오적 사고방식으로 오인할 수 있으나, 구전되던 당시 사람들의 관습과 문화를 생각해 보면 ‘옳다, 그르다’로 따질 수 없다. 그 시대의 당연한 이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편하게 다가오는 부분들이 교육적 취지, 혹은 현대사회 이념에 적절하지 않다고 하여 개작하거나 창작하는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기성품이 넘쳐나고 똑같은 치수의 구두가 다수의 여성에게 신겨지는 시대이니만큼 ‘공주 발에만 들어맞는 구두’라는 설정으로 어린 나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했던 유리구두 이야기를 전면에서 들이받는 새로운 이야기의 출현이 당연하면서 반갑다.
「노를 든 신부」 그림책에는 공주 대신 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등장한다. 유리구두 대신 배를 움직이게 하는 노가 핵심 소재로 등장한다. 표지에서 느껴지는 신부는 다소곳하고 음전하기보다 힘차게 발을 앞으로 내딛는 모습이 여장부 같다. 드레스의 부풀린 어깨가 럭비선수를 연상시키면서 노를 쥔 팔과 손이 운동으로 단련된 듯 매우 탄탄하게 느껴진다. 드레스 치맛자락을 뒤로 길게 끌고 아무 장식도 하지 않은 긴 머리를 휘날리며 신부는 군인이 행진하듯 바삐 걷고 있다.
소녀는 섬에서의 삶이 단조롭다고 여긴다. 섬을 떠나고 싶어 하는 소녀가 선택할 방법은 단 하나, 신부가 되는 것이다. 주변의 친구들 모두 신부가 되어 신랑과 함께 배를 타고 섬을 떠났던 것이다. 부모는 드레스 한 벌과, 노 한 자루를 주며 소녀의 선택을 지지한다. 이때부터 그림책은 소녀를 ‘신부’라고 명명하기 시작하며, 결혼 하사품(?)을 착장하고 새로운 인생을 향해 출발하는 장면이 바로 표지 그림이다.
그림들은 빨강, 노랑, 파랑, 초록의 원색들이 붓 자국을 남기며 계속하여 덧칠 표현되어 매우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인물의 움직임이 강직하고 힘이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게다가 왜곡된 비율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물 간 등장이 이질감을 주면서 살짝 기괴함도 동반시킨다. 표현주의 기법의 특성을 내포하고 있는 그림이다. 드레스를 입었지만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고, 신부라고 하지만 예전 동화 속 공주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그림이 결연히 내뱉는다. ‘잃어버린 구두 따위 신경 쓰지 않아. 배를 함께 탈 신랑은 내가 선택할 거야!’라고.
배와 신랑을 찾기 위해 해변을 걷는 신부에게 남자들이 말한다. 노 하나로는 부족하다고. 가만 보니 선착장에 늘어선 배 안에 타고 있는 신부들은 모두 노를 두 개씩 들고 있다. 가진 조건이 부족하여 결혼시장에서 내몰릴 판이다. 신부는 조건을 충족시켜 시장의 눈높이에 맞추는 대신 과감하게 해변의 배와 신랑을 포기한다. 조금 부족한 조건으로도 배를 탈 수 있는 산 중턱으로 방향을 틀고, 거기서 만난 대형 배 안엔 이미 수십 명의 신부가 승선 중이다. 남자는 신부가 가진 노 따위 관심 없다. 그는 다수의 신부를 원할 뿐이다. 독자적인 개성을 가진 유일무이한 신부로서의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남자의 말에 콧방귀를 뀌며 얼른 산 정상으로 향한다.
호화로운 유람선 한 대가 산꼭대기에 떡하니 얹혀 있다. 모두가 부러워할 거라며 승선을 종용하는 남자의 말을 등지고 신부는 산에서 내려온다. 글이 밝히지 않은 신부의 마음이 이렇지 않았을까. ‘저 배는 섬을 떠날 생각이 없어. 나를 호화로움 속에 가둬놓고 안주하게 하려는 거야!’라고.
세 번의 실패를 겪은 후, 신부는 더 이상 배 구하는 일에 연연하지 않는다. 배를 구할 일이 없어졌으니, 배를 소유한 남자 즉, 신랑을 선택하는 일도 의미가 없어졌다. 애초 섬에서 나갈 목적으로 배와 신랑이라는 구태의연한 방법을 선택하였을 뿐, 신부에게 결혼이나 신랑은 삶의 방향성에 크게 자리 잡고 있지 않았다. 모두가 다 하는 방법으로, 저쪽의 조건에 온전히 응하면서까지 섬을 나갈 건 없다고 신부는 판단했으리라. 다른 사람의 발에도 맞는 내 신발을 온전히 내 것으로 알아봐 주지 않을 왕자에게 이제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으리라. ‘내 신발이니 가져갈게요. 안녕히 가세요.’라고.
섬에서 나갈 방법이 요원해진 신부는 시무룩하게 앉아만 있었을까. 배에 탈 일이 없어져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진 ‘노’를 그림책은 그냥 놓아버리지 않는다. 신랑 찾기를 포기했지만 여전히 신부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소녀는 이제는 비루한 조건이 되어 버린 노를 가지고 섬에 잔류하는 방법을 생각한다. 역기처럼 들며 체력을 다지고, 간간이 산에서 내려오는 곰에 대응하는 격투 장비로 활용하는 동안 숨어 있던 운동 자질이 깨어나고 신부는 유명한 야구선수로 성장한다. 흰 드레스와 빨간 야구모자에 노를 들어 타구하는 신부의 그림이 역동적이면서도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져 웃음이 비죽비죽 비어져 나온다.
바다 건너까지 유명세를 날리던 신부는 세상 사람들의 요청으로 드디어 섬을 나갈 수 있게 된다. 그 누구의 기준에도 끼워 맞춰지려 애쓰지 않고, 자신이 가진 조건의 범위 내에서 마음껏 즐기고 노력하며 기량을 쌓은 대가이다. 탑승을 기다리는 비행기가 대기 중이고, 레드벨벳이 탑승구까지 길게 이어진 길을 신부가 예의 그 흰 드레스를 길게 끌고 노를 당당하게 어깨에 걸머진 채 걷는다.
중반 이후부터 다소 유머러스하게 전개되는 이야기가 현실성이 떨어지고 극적 반전을 유도하기 위한 억지스러움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드레스’와 ‘노’의 상징적 의미를 곱씹다 보면 이야기의 개연성이 훨씬 현실과 맞닿아 있다는 걸 깨닫는다. ‘흰 드레스’는 성인 혹은 독립으로 상징되고, ‘노’는 조건 혹은 역량으로 상징된다. 성인이 되어 독립하고자 하는 소녀의 열망이 부족함과 미진함의 여건에서 어떻게 자신의 고유성을 잃지 않으면서 당당하게 표현되고 이뤄가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도끼로 뒤꿈치를 잘라 억지로 유리구두에 발을 끼워 넣으려 했던 신데렐라의 두 언니가 자기 신체를 유일무이하게 여기고 누구의 기준도 아닌 자기 삶을 살았다면, 아마 왕자와의 결혼보다 더 빛나는 인생이 펼쳐지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