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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세상

(그림책: 「세상」)

by 안은주

부모는 벽일까, 울타리일까. 경계를 짓는 구조라는 의미에서 큰 차이는 없을 것이나, 우리는 보통 바깥과의 단절을 나타낼 때는 ‘벽’을 사용하고, 보호의 의미를 더하고자 할 때 ‘울타리’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건 넘을 수 없는 벽이야!’ 또는, ‘내게 울타리가 되어 주었어.’ 이렇게 짧은 글짓기만 해보아도 그 미세한 의미 차이가 느껴진다. 그러면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가 보자. 부모는 벽일까, 울타리일까.


세상에 태어나 이제 막 기어 다니기 시작한 아기는 집 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도록 가로막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집의 외형을 이루는 벽이자 위험을 차단하는 안전망이다. 더 나아가고 싶었던 아기는 시무룩해지고 때마침 배도 고프다. 이때 아기에게 나타난 커다란 손 하나. 커다란 손안에서 아기는 먹고, 자고, 놀고, 사랑받고.. 그리고 자란다. 이 그림책에서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손만으로 등장하는 이는 독자도 느꼈다시피 아기의 부모이다. 이렇듯 세상에 나온 아기는 부모의 손안에서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하다. 그리고 손은 아기의 안전한 보살핌을 위해 존재하는 거대한 성벽 같다.


아기는 아이로 성장하고 체구가 커진 만큼 인식의 지평도 조금씩 넓어진다. 물론 커다란 손이 제때 제공해 주는 놀잇감과 책이 아이의 머리와 마음을 키우는 데 적절한 역할을 한다. 자랄수록 아이의 세상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은 늘어나고 커다란 손은 그때마다 아이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다정하게 설명한다. 아이는 비바람에도 무너지지 않을 튼튼한 집과 원하는 모든 것들을 해결해주는 커다란 손안에서 걱정이나 두려움, 불안 따위 존재할 거라는 생각 따위 꿈에도 없이 마냥 행복하다. 키가 커진 아이의 눈에 창밖 세상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관념적 설명만으로 세상을 인식해가던 아이에게 실물 그 자체의 세상은 경이로움이다. 눈에 들어오는 창밖 너머의 첫 상(像)에 대해 커다란 손은 그것이 ‘바깥’이며, ‘세상’이라고 이야기한다. 증폭되는 호기심으로 아이는 그 세상에 첨벙 뛰어들고 싶다. 그러나 늘 아이에게 다정하고 친절했던 커다란 손이 이번엔 쉬이 답변을 돌려주지 않는다. 침묵을 지키는 커다란 손.


손이 들려주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 관념적 설명으로 돌아간다. 그토록 위험하고 무섭다는데 그러나, 창밖으로 보이는 자연과 낯선 생명체인 동물의 존재는 너무도 아름답다. 커다란 손의 이야기를 이번만큼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 와닿지 않는다. 위험이나 무서움과는 거리가 먼 찬란함과 눈부심이 황홀하게 빛나고 있다. "하지만....." 그림책이 한숨을 쉬듯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림책은 늑대에게 쫓겨 죽임을 당하는 사슴과 그 부패과정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몇 장의 그림을 넘기는 사이 세상은 아름다움에서 두려움과 공포로 변질되어 간다. 커다란 손이 말하던 세상에 대한 정의는 정답처럼 맞아들어가고 안전망으로서의 역할이 더욱 공고히 된다. 창밖 세상으로 아이를 내어놓고 싶지 않은 손의 바람대로 강자의 포악함과 죽음의 공포를 아이는 처절하게 느꼈을까. 죽음이 끝이라는 이야기에 겁을 먹지만 아이는 그 끝마저도 궁금하다.


사체는 흙으로 스며들고 이전의 활력과 생명성은 온데간데 없다. 이대로 끝인 듯하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흙에서 새로운 생명이 돋아난다! 그림책은 어린 독자를 배려하여 글은 냉정하되 그림은 덜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살점이 사라지고 뼈만 남은 동물에게서 흉측함보다는 사이사이 피어난 꽃의 생명성이 느껴지는 것도 그러한 덕이다. 아이는 이제 호기심을 넘어 세상을 동경하게 된다.


먼저 경험한 부모는 생각한다. 궂은 길과 산뜻한 길의 명징한 노선을 알려주는 것이 자신의 책무라고. 위험을 비껴가도록,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게 표지판이 되어주는 것이 부모 본연의 역할이라고. 그러나 경험하지 않은 자녀는 알 도리가 없다. 미로찾기에서 발을 헛디뎌 진창길에 접어들었다가 겨우 되돌아 나온 안도감을, 진탕에 처박혀 고뇌했던 바닥의 순간들을, 일어나 다시 찾은 길에서 얻은 희열감을. 그림책 속 아이는 세상을 향해 이 모든 경험을 열망한다. 커다란 손이 아이를 아끼고 보호하려 들수록 더 넓은 세상 속으로 뛰어들고자 하는 아이의 바람은 나날이 커져만 간다. 굳건한 벽이 되고자 하는 부모에게 아이는 울타리 이상의 보호를 원하지 않는다. 아이는 이곳 아닌 더 넓은 세상이 궁금하다. 좋고 나쁨, 쉽고 어려움에 타인의 생각이 중요하지 않다. 부모의 생각도 결국... 타인의 의견일 뿐이다.


최고의 보호와 안전망을 담보하는 커다란 손을 뒤로 하고 아이는 미지의 세상을 선택한다. 스스로 걸어들어간 길에서 기쁨과 행복은 배가 되겠지만 좌절과 배신은 홀로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 될 것이다. 손은 그러한 아이의 선택을 존중한다. 커다란 손에 그간의 감사함을 표하는 사춘기 아이의 얼굴이 낯설지 않다. 아이와 작별하면서 손이 허리를 펴고 일어선다. 아이를 돌보느라 늘 구부리고 엎드렸던 몸과 일상이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이제 부모도 아이도 세상을 향해 정면으로 선 모습이다. 그리고 부모와 아이는 각자 다른 세상을 향해 있다.


그림책 속 커다란 손이 말한다. "나의 사랑아, 잘 가렴, 너의 세상으로." 흔드는 손동작에 깊은 염려와 사랑과 믿음이 담겨 있다. 그렇게 아이는 부모와 작별한다.


벽과 울타리는 큰 의미 차이가 없다. 어떨 때는 벽이었다가 어떨 때는 울타리가 된다. 부모는 그런 존재이다. 무소불위의 벽이 되었다가 한없이 따뜻하고 포근한 울타리가 되었다가를 반복한다. 아이의 행복은 부모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공유할 수 있는 세상이 점점 작아질 때 각자의 세상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다른 형태의 경험으로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가도록 지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때의 부모는 아이를 지켜보며 믿어주는 심리적 벽과 울타리이다.


세상은 하나일지 모르나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말로 가르쳐서 전수될 수 없는 삶의 자산을 아이는 스스로 체득해가며 쌓아야 한다. 험한 세상 속에서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는 벽과 울타리가 언젠가는 스스로여야 하기 때문이다. 부모의 물리적 벽(그것이 통제이든 안전망이든)이 전환되어야 할 시점을 이 그림책은 아이가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으로 표현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우리는 여전히 부모의 품이 그립다. 삶이 신산하다고 느껴질 때, 벽이기도 했고 울타리이기도 했었던 그 커다란 부모의 손을 떠올리고 마음으로 가만히 기대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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