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내일」)
곁눈질 없이 똑바로 앞만 보며 걷는다. 내디딘 발걸음이 계속해서 뒤로 넘어간다. 밀려난 발자국은 잠시 선명한 자국을 띠다가 이내 표면이 차오르면서 형태가 사라진다. 뚜렷한 발자국을 보고 싶어 더 힘있게 땅을 딛는다. 육체의 무게와 디딤의 속도가 맞물려 만들어지는 여정의 흔적은, 그러나 단 한 번도 전체 모양을 확인할 수 없다. 걷다가 뒤돌아보면 사라지고 없다. 더 빨리 걸을수록 뒤에 남겨진 흔적도 같은 속도로 사라져간다. 그렇다고 멈춰선 안 된다. 정체하고 한 자리에 고여있는 건 삶에 대한 모독이다. 전진만이 유일한 길이다. 더 나은 시간을 고대하기 위한 전방주시이다. 더 근사한 생의 자국을 찍기 위한 고군분투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 발자국은 내 눈으로 한 번도 확인할 수 없는 걸까.
곧게 뻗은 길 위를 사람들이 걷는다. 뒷모습만 보인 채 그들은 모두 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주인공인 청록이(청록색으로 표현된 생물체)도 무리에 끼어 부지런히 걷는다. 그림책은 "매일 따라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따름을 의도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그림책은 명확히 말하지 않는다. 그저 ‘녀석’이라고 할 뿐. 곱지 않은 호칭에서 다분히 불편한 심기가 느껴진다. 역시 뒷모습만 보이며 부지런히 앞서가는 노랑이(노란색으로 표현된 ‘무엇’)가 ‘녀석’임에 분명하다. 그 모습을 흘겨보는 청녹이의 얼굴이 유쾌하지 않다. 놓칠세라 허겁지겁 뒤쫓지만, 노랑이의 보폭 이상은 뛸 수 없어 늘 일정 거리가 유지된다. 그 이상 가까워질 수도 그 이상 멀어질 수도 없는 딱 그만큼의 거리가 청녹이와 노랑이 사이에 진공상태처럼 존재한다.
청록이는 ‘녀석’인 노랑이의 정체가 궁금해 못 견딜 지경이다. 어떻게 생긴 어떤 형상의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 안달이 난다. ‘녀석’에 대한 궁금증으로 따라가게 된 것인지, 따라가다 보니 ‘녀석’의 존재가 궁금해진 것인지, 그림책이 미처 말하지 않은 것들에 독자는 자꾸 신경이 쓰인다. 노랑이로 분한 ‘녀석’이 독자에게도 궁금증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전문가의 지력을 빌리기로 한다. 그러나 과학자나 미래학자가 내놓은 ‘녀석’에 대한 의견은 청록이의 생각에 마뜩잖다. 초자연의 힘에 기대어보려 하지만 점술가의 이야기는 더욱 모호하다. 외려 ‘자꾸 알려고 하지 마’라고 언질을 준다. 이쯤이면 독자도 ‘녀석’을 ‘내일’로 바꾸어 말할 수 있게 된다. 바로 그림책 제목 ‘내일’이다.
싫든 좋든 지금이 밀려나면서 만들어지는 게 ‘내일’이다. 바로 다음 날이 ‘내일’이기도 하고, 장차 이루어질 무언가를 ‘내일’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여하튼 아직 당도하지 않은 어느 시점은 모두 ‘내일’이다. 그 ‘내일’은 아직 경험하지 않았기에 기대되기도 하지만, 어떤 것을 경험하게 될지 모르기에 불안하고 두렵다. 그래서 더욱 그 모습이 궁금하고 미리 알고 싶고, 그렇게라도 마음에 일말의 희망을 키우고, 불안을 최소화하고 싶다.
주변의 어떤 소리도 믿을 수 없다. 쫓고 있는 ‘녀석’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 청록이의 ‘내일’일지 그 누구의 의견에도 동조할 수 없다. 그건 청록이가 꿈꾸던 ‘내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해주지 않는 청록이만의 이상적인 ‘내일’을 직접 보기 위해 미친 듯이 ‘녀석’을 쫓는다. 땅바닥에 발이 닿을 새도 없이 청록이는 거의 날 듯이 뛴다. 발자국은 땅에 남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 청록이가 보고 싶은 건 ‘내일’에 당도하여 보게 될 하나의 발자국이면 충분할 터이다.
‘내일’은 따라오는 것을 체념케 할 요량처럼 산으로, 계곡으로, 그리고 위험천만하게 흔들거리는 낡은 다리 위로 청록이를 이끈다. 마치 원대한 미래에 다가가기 위해 숱한 역경을 겪어야 한다는 통상의 발상처럼. 끝끝내 그 정체를 보여주지 않던 ‘내일’이 동굴 안으로 사라진다. 그리곤 그 어디에서도 찾아지지 않는다. 따라 들어간 청록이는 어둠 속에서 망연자실 멈춰 선다. ‘내일’을 놓쳐버린 불안은 꿈꾸던 ‘내일’을 만날 수 없게 되었다는 공포로 다가온다. 새까맣게 칠해진 양면 펼침면 안에서 무언가를 쫓다가 내팽개쳐진 모습으로 청록이가 뒹굴고 넘어진다. 이것으로 ‘내일’을 잃어버리고 더더군다나 ‘내일’의 발자국도 확인할 수 없다면.
어둠에 눈이 익은 청록이가 주섬주섬 사위를 살피기 시작한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고,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 점점 살아난다. 어둠을 빠져나와 고요한 세상의 언저리에 멈춰 선다. ‘내일’을 쫓느라 돌보지 못했던 생각들이 유연한 흐름을 타고 자연과 마주한다. 그러자 마음 깊숙한 곳에서 올라온 생각 하나가 반작하면서 작은 빛을 낸다. 순간 청록이는 잊었던 자신의 이름을 기억한다. 바로 ‘오늘’이다.
그림책에 나오진 않지만, 지금 멈춰 선 자리의 발자국을 들여다보는 청록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청록이로 분한 ‘오늘’이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지금이 밀려나면서 만들어지는 게 ‘내일’이 아니라, 잘 딛고 선 수많은 ‘오늘’들이 바로 ‘내일’이 되는 것이다. 오늘 발자국을 확인하지 않으면서 내일의 발자국이 더 근사할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미덕인 세상에서 이 그림책은 이의제기한다. ‘지금’을 간과하면서 쫓고 있는 ‘내일’은 꿈에 그리던 이상적인 발자국을 보여줄 것인가. 주변을 살피고 어디쯤 와 있는지 가늠해 보는 여정이 탈 없는 여행길을 만든다. 인생도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내일’에 기대어 ‘오늘’을 홀대하고 있다면 챙김받지 못한 수많은 ‘오늘’들이 만들어 낸 ‘내일’과 달게 마주할 수 있을까.
작가는 ‘내일’을 따라가다가 우연히 만난 그림책과 함께 그동안 잊고 있던 ‘오늘’을 즐겁게 살고 있다고 적고 있다. 따라다니는 일과 중에 마음에 반작하는 무언가가 우연히 스친다면,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혹시 잊고 있었을지 모르는 ‘오늘’이라는 ‘귀둥이’를 찬찬히 훑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