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남의 말을 듣는 건 어려워」)
말하기와 듣기는 서로 연결된 영역이다. 말하는데 듣지 않을 수 없고, 듣지 않고 내 말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독백이 아닌 이상 말이다. 말이 오가는 대화란 말하기와 듣기의 연속적인 진행 과정이다. 이때 상대의 말에 대한 반응과 피드백이 내 말이 되어 나오는데 이는 듣기를 전제로 한다. 즉, 대화란 말하기와 듣기의 순서 지키기이다. 물론 말하기로만 이루어지는 강의나, 듣기만 진행되는 상담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일방적인 말하기, 일방적인 듣기만으로 소통이 이루어지진 않는다. 말하기, 듣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번갈아 가져야 할 대화자의 권리인 셈이다.
어린아이의 경우, 순서 지키기가 어렵다. 비단 사물 이용이나 공간 사용에 대한 줄서기, 차례 지키기뿐만 아니라 대화에서도 내 순서에 해당하는 말하기와 듣기를 이행하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다.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기 때문으로 학자들은 그 이유를 대기도 하지만, 상대의 말을 주의 깊게 들을 정도의 집중력이 아직은 시간상으로 길지 않고, 하나의 주제에 대해 말하기, 듣기를 번갈아 가며 내용을 주고받을 만큼의 정신적 표상을 갖지 못하기 때문으로도 풀이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대화하는 그 자체에 대한 경험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일 수 있다. 어린아이들은 모델링을 통해 성장한다. 사회적 기술을 익혀나간다.
우화의 형식을 띤 이 그림책에서 주인공인 어린 물총새는 우리의 아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아빠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고 제 말만 떠들어대는 물총새. 생존에 필요한 반드시 익히고 터득해야 할 긴급한 기술이지만 어린 물총새에게는 지루하기만 하다. “네가 말을 하면, 남의 말을 들을 수 없어.”라며 상대방의 말하기 순서를 빼앗지 않고 들을 것을 강조하고, “남의 말을 듣지 못하면, 배울 수도 없단다.”라며 주의 깊게 들은 내용으로부터 정보를 얻는 방법을 이야기하지만, 물총새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실컷 떠들어댈 수 있는 대상을 찾아 날아가 버린다. 어린 물총새는 흥미가 없는 주제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며, 대화에서 갖춰야 할 인내력과 집중력이 아직은 부족하다.
앵무새 무리를 발견한 물총새. 숲이 떠나가라 수다를 떨고 있는 앵무새들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화가 아니라 각자 자기 말만 하고 있다. 그림책은 이 장면에서 각각의 앵무새가 떠들어 대는 말을 길게 글자 줄로 나열해 놓고 있다. 수십 마리의 앵무새와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의 기다란 줄은 그러나, 단 한 줄도 서로 섞이지 않는다. 섞일 수 없을 만큼 그것은 서로 다른 주제와 내용의 말들이기 때문이다. 일방적인 ‘말하기’로, ‘듣기’의 순서가 사라진 이 대화(?)로 인해 숲에서 나는 여타의 소음은 묻혀 버린다. 사냥꾼들이 천천히 다가오는 소리조차도.
머리 위로 그물이 떨어지고 그 안에 갇히게 될 때까지 그들의 ‘말하기’는 계속된다. 어두운 상자에 갇혀 빛을 잃게 되어서야 급박한 상황에 처했음을 알게 되지만 너무 늦었다. 어딘가로 이동하여 다시 커다란 새장 안에 갇히게 된 앵무새 무리와 물총새. 곧 정신을 차린 물총새는 앵무새들과 탈출 방법에 대해 논의하려 하지만, 똑똑하기만 할 뿐 절대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앵무새들의 ‘말하기’ 소음에 둘러싸여 좌절하고 만다. “새장 안에 있는 또 다른 새장에 갇힌 기분”이라고 글이 이야기하는 동안, 그림은 앵무새가 떠들어대는 말들로 철조망을 이룬 새장과 그 안에 갇힌 절망한 표정의 물총새를 그리고 있다.
탈출에의 희망을 잃은 물총새는 ‘말하기’를 그치고 조용히 침묵한다. 먹이를 주러 가끔씩 오는 사냥꾼과 종일 자기 말만 해대는 앵무새들이 세상의 전부가 되어 버린 새장 안에서 물총새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 모든 소음을 묵묵히 듣는 일뿐이다. 그렇다! 물총새는 드디어 ‘듣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앵무새가 쏟아낸 두서없는 말들이 거르지 않은 정보처럼 거친 문체로 도배되어 양면펼침 가득 그림으로 표현된다. 쏟아지는 말들 아래, 골똘히 생각에 잠긴 물총새의 모습. 물총새는 앵무새들이 저마다 내놓은 말들의 홍수 속에서 중요한 정보들을 하나씩 포착하게 된다. ‘둥근 다이얼을 돌릴 때까지’, ‘빨간 단추를 누르기’, ‘손잡이를 내렸을 때’, ‘기계의 왼쪽 부분’ 등, 앵무새가 흘린 말들을 조합하고, 누락된 부분은 더 주의 깊게 들으면서 드디어 새장을 탈출할 방법을 알아내게 된다.
‘듣기’로부터 발견한 탈출 방법대로 새장 문이 열린다. 환호하며 외치는 물총새. 그러나 자기 ‘말하기’에만 급급한 앵무새들의 소리에 물총새의 환호는 묻히고 만다. 새장 문이 열린 것도, 밖으로 나가야 할 순간이라는 것도 모르는 앵무새들을 남긴 채 물총새는 드디어 밝은 세상으로 나온다. 집으로 돌아온 물총새는 걱정했던 엄마, 아빠를 향해 “남의 말 듣는 법을 배우고 왔어요!”라며 그간의 경험을 짧게, 그러나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앵무새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림책은 말하지 않는다. 독자의 해석으로 넘기는 편을 선택한다. 똑똑하고 말 잘하는 앵무새는 아는 것은 많지만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는 오만한 사람을 빗댄 표현이다. ‘듣기’가 부족한 사람이다. 애초에 대화에는 순서가 있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내 의견을 주지시키는 것이 대화의 목적이다. 여전히 이런 부류의 사람을 종종 마주한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때론 ‘가짜 듣기’를 하는 사람과의 대화로 당혹스러울 때도 있다. 귀 기울여 나의 ‘말하기’를 들어주는 것 같지만, 그들은 ‘듣기’를 반영한 ‘말하기’를 하지 않는다. 한결같이 자신의 ‘말하기’만을 고집한다. 앵무새와 같은 성인이 모델이 된다면, 우리 아이들의 결과 또한 그림책의 결말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그림책은 인간사회를 빗댄 우화라고 할 만하다.
아이들은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고, 인내력과 집중력이 부족하고, 흥미 없는 주제엔 일절 관심을 두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화의 기술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와 눈높이를 맞춰 대화 나눠 본 적이 있는가? 무릎을 구부려야 하는 수고스러움이 생긴다. 어린아이의 터무니없는 상상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 적이 있는가? 비논리적인 이야기를 들어야 하기에 집중력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이런 노력을 하는 성인과의 대화 경험이 아이들의 대화를 숙련시킨다. 내 말을 잘 ‘듣기’한 성인의 모델링이 있어야 아이도 잘 ‘듣고’ 싶어진다.
남의 말을 듣는 건 어렵다. 듣고 싶지 않고, 듣기 싫고, 듣기 귀찮다. 하지만 독단이라는 공격을 받지 않으려면 내 생각과 의견을 남의 말 ‘듣기’로 검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귀엽고 착하기만 하던 아이가 사춘기가 되더니 말도 안 통하고 문 잠그고 제 방으로 사라져버리면 자식 키워 뭐하나 허망해진다. 자녀의 독단적인 말과 행동을 탓하기 전에, 들어서 이해 안 되고 보아서 허용할 수 없을지라도 일단 잘 ‘듣기’를 권유해 본다. 이 그림책을 함께 읽으면 더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