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당신을 측정해 드립니다」)
친구의 주먹 쥔 손이 펼쳐지고 옹송그려져 있었던 구슬들이 손아귀 안에서 주춤주춤 흩어지며 모습을 드러낸다. 일 초 전 외쳤던 짝수, 혹은 홀수가 제발 맞기를 눈으로 헤아릴 새도 없이 친구는 야무지게 구슬의 짝을 맞춰 간다. 구슬이 많고 적음은 문제가 아니다. 짝이 맞아떨어지는지 한 개가 남는지가 관건이다. 두 개씩 세어가던 손이 마지막 구슬에 다다른 순간, 친구와 나는 동시에 수 이름을 외친다. 짝수와 홀수 개념을 인식해가던 초등 저학년 시절의 놀이였다.
보다 심화된 숫자의 법칙들을 대하면서 점점 수 세계와는 거리가 멀어졌지만, 짝꿍이 있는 숫자와 그렇지 않은 숫자에 대한 이해는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나의 일상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단언컨대, 나는 짝수를 좋아하지 않는다. 무의식에 잠재된 이 불호는 반대급부로 홀수를 과하게 선호하는 성향으로 표현되곤 한다. 예를 들면, 음향이나 속도, 온도, 강도를 표시하는 기기를 사용할 때 그 수치를 홀수에 맞춰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TV의 볼륨을 ‘9’로, 에어컨 온도를 ‘25도’로, 선풍기의 풍력을 ‘3’으로 설정해 두는 것이다.
짝꿍은 서로에게 우호적 성격이 아니라 비교하고 견제하면서 나를 더 향상하기 위한 기준으로서 존재한다. 갓 입학한 중학 1학년, 담임선생님은 나와 늘 붙어 다니는 친구의 성적을 언급하며 다음 시험엔 그 아이를 능가하는 등수여야 한다고 격려 아닌 격려를 하였다. 마음 한구석에 좋지 않은 비밀을 담고 다니는 것처럼 아리고 저며 어느 날 제 발 저리듯 친구에게 토로했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도 똑같은 얘기를 선생님에게 들었다고 말하던 아이. 별것 아니라는 듯 화제를 돌리려는 친구에게 ‘난 너를 이기고 싶지 않아.’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으며 이 우정이 영원히 지속되길 꿈꾸었다. 그러나 엎치락뒤치락 등수가 오가고, 선생님의 격려가 이간질의 풀무질로 작동하는 동안 친구와 나는 더 이상 짝꿍일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즈음부터 둘씩 맞춰진 짝수를 보면, 겉보기엔 완벽하게 똑 떨어진 맞춤처럼 보이지만 서로 견제하며 올라서려는 아웅다웅의 스멀거림이 숫자 안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짝수로 맞춰 놓았다는 건, 비교할 상대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 그것이 짝수에 대한 나의 불호의 이유이다. 이 세상에 나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비교의 대상이 없으며, 비교할 필요도 없다. 이것이 나의 홀수에 대한 선호의 이유이다. 이 세상 끝까지 짝을 지어 놓아도 여전히 하나가 남는 이 홀수야말로 명쾌하고 짜릿하며 온갖 방식으로 나를 재단하려 드는 이들에 대한 반격이다. 아주 소소한 복수이다.
이 그림책은 나의 짝수에 대한 경험과 생각을 완벽하게 드러낸다. ‘측정’이라는 어휘가 ‘기준’과 ‘재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니 제목부터 공격적이다. 노골적이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을 비교해 드립니다’가 될 것이므로.
다양한 고양이 종, 열여섯 컷으로 그려낸 표지 그림은 그나마 사람이 아니라서, 사람을 대체하고 의인화한 동물로 완곡하게 표현한 그림이라서 그 옆에 세로로 쓰인 ‘당신을 측정해 드립니다’라는 제목이, 표지를 넘기기도 전에 그림책을 밀어낼 거북스러움을 다소나마 진정시킨다. 그렇게 넘긴 면지(표지와 연결된 지면)에서 독자는 각종 측정 기기들과 마주친다. 길이나 무게, 부피, 양, 압력, 시간, 심지어 능력까지... 이 모든 것들을 측정하여 숫자로 만들어주는 기기들이다. 이 기기들은 독자가 사용해 본 적이 있거나 신체에 들이대어 사용당해 본 적이 있는 것들이다.
그림책 페이지를 휘리릭 넘겨 뒷면지(뒤표지와 연결된 지면)를 펼치면, 앞서 본 기기들에 의해 판명된 측정 결과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래프, 눈금선, 피라미드, 원, 육각형 등의 그림이 측정된 대상의 신체 곳곳을 최대한 극명한 수치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쯤에서 독자는 휘리릭 넘긴 페이지들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측정이 줄기차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당연지사로 짐작하게 된다.
측정될 때 나는 ‘하나’로 홀수이나, 측정되어 수치화되는 순간 ‘준거’와 한 쌍이 되면서 비교당하는 악전고투가 시작된다. 짝수의 악몽인 것이다. 무엇을 측정하든 그 세계의 ‘기준’과 ‘표준’이 내게 짝꿍처럼 달라붙어 은밀한 대비가 이루어진다. 짝꿍(기준)을 앞서든지 뒤처지든지 그것의 모든 결과는 나를 설명하는 것처럼 포장되어 거대한 산점도의 무수한 점들 속 미미한 점 하나로 찍혀 표현된다. 그것이 정말 나를 설명하는 위치일까, 내가 가진 능력의 정도일까, 미래까지도 예측할 수 있는 역량일까.
작가는 머리말에서 ‘당신은 누구인가’를 묻는다. 그 물음에 답을 하기 위한 경로로 ‘물리학적, 생물학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방법을 동원한 가능한 많은 값의 측정’을 통해 ‘당신의 의미’를 찾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나를 탐색하기에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은 측정으로 얻은 수치화된 결과가 나를 보다 선명하게 말해 줄 것이라 기대할지도 모른다. 온갖 ‘표준’과 비교되어 매겨진 순위와 구석구석 서열화된 도표를 들고, 내가 점하게 될 자리를 이 사회 속에서 가늠해 보면서.
사람을 대신하여 기초부터 첨단의 측정까지 갖은 검사에 응하는 고양이 모습을 그림으로 넘기며 누구든 그 자리에 자신을 넌지시 대입해 볼 것이다. 그러면서 측정 결과를 얼추 숫자로 만들어가며 때로는 흡족해하고 때로는 어깨가 움츠러들곤 할 것이다.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숫자 앞에, 그것이 나를 온전히 표현하는 수치인지 되물어 본다. 반올림으로 무마하여 버려진 숫자들은 내가 아닌 것일까, 버려진 숫자들이 표현하는 나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작가는 그림책을 넘기며 불유쾌해진 독자의 마음을 어루만지듯 꼬리말에서 다시 글을 남긴다. 그 내용이 궁금한 독자라면 이 그림책을 찾아보길 바란다. 필자는 세상의 ‘기준’과 짝꿍이 되지 않으려는 필사의 노력으로 홀수를 선호하지만, 짝수와 직면해서도 비교의 관계를 떠올리지 않으려 애쓸 것이다. 이제는 짝수의 틀 안에서 아웅다웅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짝수의 반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