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난중일기 05화

믿는 도끼엔 발등이 찍히지,

엄마 발등은 괜찮아. 정말 괜찮아....

by 세일러 문

아이들 어릴 적 사진을 보고 있다. 네다섯 살 무렵의 겨울. 오후면 보리차를 컵에 담아 예쁜 티코스터를 깔고 창가에 나란히 앉아 광합성을 하곤 했다. 해가 늦게까지 들어오는 남서향집, 마침 아파트의 조경이 한눈에 잘 보이는 가든뷰라 계절이 오고 가는 것과 사람들이 오고 가며 저마다의 인생을 사는 것을 바라보곤 했다. 아이들은 애착인형을 초대해 함께 그 시간을 즐기곤 했고, 아이들을 키워낸 칠 할의 호비는 티타임의 단골손님이었다.


사진 한 장으로 소환된 시절이 마치 어제 같다. 연년생 남매의 독박육아, 그 시절의 분주함과 그 가운데 느꼈던 심심함, 잔잔한 행복들이 문득 그리운 요즘. 사춘기 남매와 사십춘기 부모들의 호르몬 대환장파티, 이 전쟁통에 찾은 효과 만점의 극약처방이다.


평생의 효도는 어릴 때 한다더니, 맞아 맞아 정말 맞아 꼭 맞아.




"제군들, 일주일의 일과를 한 시간 후에 검사할 예정입니다. 혹시나 빠뜨리거나 미뤄둔 일이 있다면 바로 실시합니다. 실시!"


아이들을 믿지만, 아이이기에 빠뜨리고 실수하는 일이 있음을 용인하려 한다. 팍팍한 엄마이기보다는 푸근하고 다정한 엄마로 아이들 곁에 있고 싶은 마음에, 아이가 거짓말을 할 상황을 최대한 만들지 않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한 시간 전의 알람으로 아이들도 괜찮은 아이들이 되어 가고 있다. 깜빡했던 숙제나 해야 할 일을 하고 검사를 맡는 훈훈한 방학의 주말이다.


그럭저럭 괜찮았던 지난주(실은 엄마가 바빴음)였음에 자발적 연재의 늪에서 미션을 완수하지 못할 위기에 놓였다. 푹 쉬는 주말을 보내고 시작되는 한 주를 맞이하자는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갈 뻔했는데,,,,, 나의 믿는 도끼인 딸내미가 글감을 가져다 주니, 그녀는 역시 진정 효녀이다. 초보엄마가 곤란할 새랴 탯줄까지 잘 말려 병원에서 떼고 나왔던 햇님이. 첫 딸은 하늘이 주신다고, 그녀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바쁜 남편과 청개구리 아들을 대신해 나를 웃게 하고 살게 했던 나의 믿는 도끼.


오늘은 일요일. 금요일 미완료 학원숙제,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엄마, 죄송해요. 몰랐어요. 한 번만 봐주세요옹."

"햇님이, 엄마 발등 좀 봐줄래?"

"네?"

"방금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거든."


개학 전에 다시 해리포터 정주행을 하겠다며 전권 읽기와 영화보기를 병행하고 있는 남매. 할 일을 다하면 무한의 자유시간이 주어지는 암묵적 가족 규칙에 따라 신나게 영화도 보고 책도 읽었겠다. 방금 마지막 시리즈 죽음의 성물에서 덤블도어가 돌아가셨다며 책을 붙들고 찔찔 즙을 짜던 그녀다.


너마저...... 5초 정도 배신감에 싸여 있다가 햇님이가 어떤 어른이 되기를 바라는지 생각한다. 순종적이고 성실하기만 한, 삶의 즐거움을 즐길줄 모르는 삶을 살기 원하지 않는다. 믿는 도끼가 어느 정도의 능청스러움까지 겸비한 것이 귀엽기도 하고 이것마저 아이의 성장으로 느껴지니, 날마다 아이들을 검사할 성실함이 부족한 게으른 엄마는 나름 만족한다.


반면 모처럼 할 일을 빠짐없이 두어 기세등등한 별님이. 남매가 균형을 이루어 한 놈이 못할 때는, 또 한 놈이 그런대로 잘 해냄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아들에게 폭풍 칭찬을 쏟아주고는 아들의 뿌듯함이 전달되어 엄마의 마음도 그럭저럭 괜찮은 이다.




애들아빠가 루틴인 운동을 나가려는 기세를 포착하여, 한쪽의 숙제를 마친 햇님이와 별님이 둘도 덤으로 내보낸다. 그렇게 주말의 훈훈한 마무리를 위해 서 씨 셋은 산책을 나갔고, 격렬하게 혼자 있고 싶던 엄마도 소원 성취를 했다.


한 걸음 떨어져 생각하니, 아이에게 했던 믿는다는 말이 미안하기도 하다. 너를 믿어서, 믿기 때문에, 엄마는 너를 믿어. 이 말들이 때때로 아이를 지켜주었을 테지만, 때로는 얼마나 숨 막히고 무거웠을지,,, 그 무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돌아온 아이에게 엄마의 발등은 괜찮다고 말해주어야겠다. 아이이기에 할 수 있는 실수들을 조금 더 푸근한 마음으로 안아주어야겠다 다짐도 해본다. 물론 이 다짐이 그리 오래 가지 않고, 분노와 절망 속에 빠질 수도 있겠지만, 괜찮다. 나에게는 백만 스물 하나의 사진들, 효도로 기억할 수많은 추억들이 있으니 말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