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난중일기 06화

패션테러리스트지만 괜찮아,

사춘기 딸의 우상 스티브 잡스여, 영원하라

by 세일러 문



밤 여덟 시, 귀가한 딸의 얼굴이 시름으로 얼룩져 있다. 학원을 다녀오느라 허기진 것과는 다른 류의 시름이 투명한 햇님이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햇님아, 무슨 일 있었어?"


둑이 무너져 범람하듯 참아온 감정의 홍수가 속수무책으로 쏟아져 내린다. 햇님이에게 무언가 일이 있었던 것 같아 실컷 울고 털어낼 수 있도록 연신 등을 쓰다듬어 내린다. 너무도 고맙게 온량하게 자라주고 있는 햇님이가 한 번씩 이렇게 무너질 때면 덜컥 가슴이 내려앉지만 엄마의 불안이 아이에게 득이 되지 않는 법. 최대한 마음을 다잡고 침묵의 언어로 위로를 건네며 그녀의 곁을 지킨다.


"친구들 대화 속에서 저만 혼자 외계별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애들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같은 sns얘기하고, 패션 평가 서로 주고받고 하는데 저는 할 얘기가 없더라고요. 그리고 애들이 너는 왜 맨날 똑같은 옷을 입냐며, 애들끼리는 같이 시내 쇼핑 가서 옷도 봐주고 한다던데, 저는 애들이랑 시내에 나가본 적도 없고, 유행하는 옷도 없고... 제가 잘못 살고 있는 건가 생각이 들었어요. "



어려서부터 인형놀이보다는 자동차나 공룡을 가지고 놀았던 딸이다. 하루 30분의 폰 사용 시간은 가끔 게임을 하거나 스토리콘을 보거나 쓰는 데 쓰다 보니, 햇님이의 카톡에는 몇 백 개의 확인하지 않은 톡들이 늘 적체되어 있다. 혹시나 햇님이의 이런 무던한 성향이 교우관계에 영향을 미칠까 걱정했지만 막상 대면해서 친구들이랑 잘 지내고, 친구들도 이젠 햇님이는 카톡을 잘 안 하니까~ 받아들이는 분위기라 감사했던 터.


이제 컸으니 당연히 알아서 옷을 입겠거니, 아이의 의생활에 대해서 무심했던 것도 사실이다. 체격이 비슷한 연년생 남동생과 옷을 휘뚜루마뚜루 같이 입는데, 옷도 골라 입는 것을 귀찮아하다 보니 꺼내어져 있는 옷들을 부지기수로 입는다. 그리고 하필 구매담당인 엄마가 제일 좋아라 하는 색이 멜란지 그레이색을 비롯한 무채색 계열인지라 장롱엔 그런 취향의 옷들만이 존재, 그 옷이 그 옷 같기도 하다. 밝은 색 옷을 입히며 밝게 키우고 싶었는데, 알록달록한 옷을 입혀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아 급 미안함이 몰려왔다.


"햇님이 많이 속상했겠다. 엄마가 미안해지기도 하네. 햇님이도 sns 하고 싶어? 엄마가 아이디 만들어줄까? 그런데 그렇게 되면 너무 많은 관심거리가 생기게 되기도 하고, 네 활동에 대한 책임과 관리가 따르게 된다는 것도 햇님이가 잘 유념해야 해."


극 F의 엄마도 왜 사춘기 자식 일에는 극 T가 되는지, 공감보다는 해결책과 문제점을 분석하게 되니 차라리 말을 아끼는 편을 택한다. 골똘히 생각하다 지금 생활에 만족한다는 햇님. 귀찮아질 것 같아서 안 하겠다는데, 딸아이의 귀차니즘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친구들이랑 시내에도 나가고 싶지? 그럴 거야. 엄마는 햇님이는 믿는데 세상 어딘가에 있을 무서운 사람들을 못 믿겠어서... 햇님이가 스스로를 잘 지킬 수 있을 때 얘기해 줘. 그러기 전까진 엄마랑 시내 데이트 가볼까? 가서 햇님이 입고 싶은 옷도 사고."


금세 풀어지는 딸아이를 보니, 시름이 깊지 않았던 것 같아 다행이기도 하고,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아이이구나 싶기도 하다. 기분 좋게 저녁을 먹고 재잘재잘 떠들다 씻고 잠자리에 든다. 네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치를 가지고 그 가치를 그리며 사는 것뿐이라고.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을 잘 생각해 보고 그것들과 함께 추구하는 가치들을 지키면서 행복하게 사는 게 엄마가 살고 싶은 삶이라 얘기하면서도, 하루 종일 부엌을 종종 거리고 고양이를 모시며 자주 웃고 있는 내 삶이 내가 추구하고 있는 가치를 향해 잘 가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잠이 들었건만, 애미는 아이가 패션테러리스트로 낙인 된 것이 아닌지 실체 없는 불편함에 괜시리 인터넷을 뒤적인다. 어둠 속에서 침침한 눈을 비벼가면서. 잠이 쇼핑을 하는 것인지 쇼핑이 잠이 드는 것인지 모르게 의식을 잃는다.





어제의 감정 홍수는 나에게 닥쳤던 자연재해인 것인지 맑은 햇님이의 웃음이 눈부시다. 학원을 나서려는 딸아이의 차림은 어제 남동생이 벗어둔 허물 그대로를 얹었으니.


"햇님아~ 옷 좀 신경 써서 입고 가지~. 그리고 엄마가 유행하는 옷들도 좀 사주려고."


애미의 성실함은 이미 쇼핑 장바구니에 초등학교 고학년 여자 아이들에게 유행할 법한 옷들을 가지가지로 담아두었겠다, 이제 퇴직금만 입금되면 알록달록한 몇 개 정도는 새 학년 선물로 주문해 주리. 그런데 말입니다. 햇님 왈,


"지금도 충분해요, 엄마. 여기서 더 많아지면 지구가 아파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저도 스티브 잡스처럼 살아볼래요. 옷 고르는 거 신경 쓰지 않으려고 평생 청바지에 검은 티만 입으셨다잖아요."


감정의 홍수 속에서 이리저리 다닌 내가 부끄러우면서도, 이만큼 자란 믿음직한 딸아이가 더없이 고맙게 느껴진다. 사랑받는 아이의 단단한 믿는 구석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게 되었고, 아이가 더 믿어도 될만한 믿는 구석이 되어야겠다고 새삼 다짐도 한다.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려 담대하게 패션테러리스트가 되길 자처하는 햇님이가 엄마보다도 백배 천배 용기 있고 멋지게 느껴진 날.


패션테러리스트 사춘기 딸의 우상 스티브 잡스여, 영원하라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기본 한 두 사이즈는 업해서 마련했던 의복 덕분에, 접어 입고- 말아 입고 돌려 있던 울 애기들 패피 시절. 사연을 담고 있는 옷들도 추억이 되네요.



* 사진 출처 : http://www.inicons.com/ & 추억보관함.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