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는 애석하게 백화점이 없다. 있다 해도 쇼핑을 하러 자주 갔을 것 같지 않지만, 백화점의 부재는 그 자체로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간만에 맡는 고속버스터미널 신세계 백화점의 향기는 여전히 좋다. 여전히주목적이 쇼핑이 아니래도.
모처럼 벼르던 서울 행차다. 아이들 방학맞이 할머니댁 방문 픽업 서비스로 원래 계획은 연년생 남매 둘만의 첫 버스여행이었지만 지난주 은평구 일본도 사건이 발목을 잡았다. 이런 불행과 불운을 당연히 비껴갈 거라 자신하지 못하는 간장 종지만 한 내 그릇은 삶을 수시로 피곤하게 한다.
"오빠, 둘이서 안전하게 갈 수 있을까? 애들은 어느 정도 믿는다만 너무 무서운 세상이 되어버린 게,그게 걱정이야."
"그럼 달님이너가 같이 버스 타고 데려다주고 오든가~ 그리고 가는 김에 서울 가서 삼송빵집빵 10개만 사다주라."
"엥? 뭐야 진정한 빵셔틀?"
"가서 백화점도 둘러보고 예쁜 가을 옷이나 뭐 사고 싶은 거 하나 사 오라구."
꽤나 스윗하게 들리는 남편 말에서 두 가지 숨겨진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짬바다.첫째, 삼송빵집 덕후인 남편은 진심 아내의 빵셔틀을 원하고 있다는 것, 둘째는 아내의 검소함을 잘 알아하는 말로 나름의 포인트를 적립하기 위함이라 것.
차로 데려다줄까 고민하다 아이들도 은근 기대했던 버스여행의 설렘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둘러 나의 표도 예매했다.그렇게 그리웠던 백화점이다. 터미널로 마중 나오신 어머님을 만나 강릉에서는 먹을 수 없는 아웃백 런치를 맛나게 먹고 아이들을 어머님 댁에 보냈다. 이제 남은 백화점쇼핑과 빵셔틀 두 가지의 임무.
첫 발령을 받은 학교의 출퇴근은 백화점을 끼고 있는 지하철을 통해서였다. 퇴근길의 즐거움은 지나는 백화점 1층의 갓벽한 공간에 함께 있었고, 적당한 온도와 습도, 코끝에 스미는 우아한 향기는 언젠가는 갖고 싶었던 무엇이었다.
200이 채 되지 않는 초봉에 백화점 쇼핑은 사치라며 서둘러 공간을 통과하던사회초년생은 언젠가는 백화점이 불편한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시간에 쫓기지 않게 물건을 둘러보다 "이걸로 주세요." 무심하게 카드를 내미는, 시간도 지갑도 넉넉한 사람들을 동경하며. 어쩌면분과 초 단위로 바삐 살아가는 가난한어린 마음에 시간도 지갑도넉넉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도 같다.
뼛속까지각인되어 있는 검소 유전자로 인해여직 최저가의덫에서해방되지 못했고 검색에 검색을 더하며 시간을 써서 돈을 아끼고 있으니.돈을 써서 시간을 아끼는 부자들의 삶은 어쩐지 나에게요원해 보인다.이 역시 싫지만 어쩔 수 없는 간장 종지 비슷한 내 그릇.
백화점의 반짝반짝한 모습과 묘한 이질감을 느끼며 세련된 서울 백화점의 풍경과 어우러지지 못하고 돌고 돌다지하 팝업 스토어에서 마음에 드는 인도원단 앞치마 한 장을발견한다. 무슨 마음일지 잘 알겠으면서도 모른 척 하고 싶어 외면하려 했지만 어느새 손에 들려 있는 그것.소박한 쇼핑템으로 만족스러운 쇼핑도 마쳤겠다 이제 빵셔틀이다.
그런데 럴수럴수 이럴 수가. 고터 신세계엔 삼송빵집이 없단다. 강릉은 집 앞이 다 바다고회를 즐겨 먹는 어촌의 삶을 살겠거니 상상하는 서울 사람들처럼, 시골쥐 둘은 당연히 백화점엔 삼송빵집이 기본으로 있을 것으로 상상했다.서울살이 10년의 삶도 이젠 다 추억이 되어버린남편에게 이 비보를 전하며 대신할 맛난 빵을 찾았지만 삼송빵집 빵이 아니니 의미가 없게 된 빵셔틀.
남매가 기대했던 버스 여행이 씁쓸하게도 그저 폰 시간제한 없이 폰게임을 해대는 무한의 게임시간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말 한마디 않고 게임을 해대는 통에 이것이 버스여행인지 게임방체험인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지만, 괜찮다.
비록 남편이 기대했던 빵셔틀도, 시골쥐의 백화점 쇼핑도, 어렸던 내가 동경했던 삶에 가까워지지도 못한,뭐 하나 제대로 해낸 것이 없는 오늘이지만, 괜찮다.
나에게 주어진, 무려 120시간 동안의 자유가 있으니 말이다.강릉으로 향하는 고속도로가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지는, 아름다운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