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원장님은 식물을 돌보는 재주는 영 없다. 환자들을 굽어 살피는 만큼 식물들에게도 그러했다면 묵묵히 자라나는 기특한 녀석들도 쾌유의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유명을 달리한 녀석들이 몇 있다. 사는 일에 바빠 주에 한 번 들러 물 주기도 힘들었던 시절, 생사의 기로에서 애타게 식집사를 기다렸던 나무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미안함이 몰려오는데..... 식집사의 정식계약으로 을씨년스러웠던 공간이 생명의 기운을 품고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이곳에 식물들이 들어오던 날을 기억해 본다. 때는 바야흐로 코로나가 기승을 부렸던 2021년,새 학년이 시작하는 3월 2일 남편은개원을했다. 전날, 대설이자 폭설로 내 작은 차는 눈길을 가를 수가 없어 차를 두고 퇴근할 수밖에 없었거니와, 족히 오십 센티는 내렸을 눈길을 뚫고 우리 직원들이 첫 출근을 무사히 할 수 있을지, 폭설로 환자들이 한 명도 오지 않는 것은 아닐지 밤새 뒤척이다 뜬 눈으로 지새우다시피 했던날.
첫날 방문한 환자분들의 수만큼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는 개업 화분들이 하나 둘, 눈길을 뚫고 도착했다. 친구들, 직장의 동료들, 친족분들, 양가 어르신의 향우회 지인들의 마음이 담긴 화분들이 도착할 때마다 고심하여 완성된 인테리어와 어우러지는, 볕 좋은 곳을 찾아 그것들을 잘 두었더랬다. 그렇게 식물들은 병원의 일부가 되기 시작했고, 병원 식집사로서의삶도시작되었다.
온도나 습도, 일조량이나 풍량이 맞지 않아 한 번씩 식물들이 몸살을 앓아 마음이 아플 때면 개업날 화분들을 배달해 주셨던 꽃집에 들르곤 했다. 식물 영양제나 다른 작은 식물들이나 화분들이 손에 들려 있었지만 주목적은 사장님께 자문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우리 식물주치의 사장님 또한 어찌 그리 명의신지 죽어가는 식물들을 잘 살려낼 처방들을 잘 알려주시니감사한 일.
4년의 세월 동안 먼저 저 세상에 간 식물들몇몇은 빈 화분으로 오래도록 추모했고, 몇몇은 여전히 처음의 자리를 지켜주고 있다. 저마다의 인연과 이야기를 가진 식물들이다. 물을 주거나 곁 잎을 따주며 돌볼 때마다 선물해 주신 분께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그분들과의 추억이 방울방울 떠오르곤 했다. 그 인연에 이제 4년이라는 세월이 더해져 가랑비에 옷 젖듯 식물들에게 정이 들었다.
매해 봄이면 기특하게 꽃을 피워 올리는 진료실의 서양란, 죽은 줄 알았는데 다시 새 잎을 올려 고마웠던 데스크 앞의 뱅갈 고무나무, 언제 봐도 초록 초록 씩씩하게 잘 자라주는 셀렘과 폭풍 성장으로 더 큰 화분으로 옮겨 심은 금전수 등등.... 나름의 기억들로더 애틋해져, 병원에 방문하는 환자분들의 빠른 쾌유와 더불어 이 식물들의 무병장수도 기도하고 있다.
재작년부터 매해 꽃을 피우는 호야는식집사의 큰 기쁨이다. 식물들은 더디 자라기에 한 번씩 몸살을 앓을 때 정신이 바짝 들도록 그존재감과 소중함을 사무치게 깨닫는 점에서 울적해지곤 하는데, 그런 점에서 호야는 꽃으로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는 고마운 식물 중 하나다. 나의 전 직장 멋쟁이 부장님께서 선물해 주셨던, 부장님을 닮은 우아한 노란 꽃의 서양란 화분.서양란은 먼저 저 세상에 갔지만,앞에 살짝 꾸밈으로 있었던 호야가 터를 잡고 무럭무럭 자라주었다.(부장님의 옹이들도 또 다른 기쁨으로 자라날 것을 믿고 응원한답니다. )
그런 호야꽃이 또 왔다. 볕이 잘 들고 바람도 잘 통하는 창가에서 탐스럽게 피는 예쁜 호야꽃은 나뿐 아니라 식물을 좋아하는 식물애호가 환자분들에게도 또 하나의 기쁨이 되어주고 있을 것.
몽우리들이 빚어놓은 클레이 알갱이처럼 오글오글 올라오기 시작하면 즐거운 기다림이 시작된다. 그 자체로도 귀하고 아름답지만, 이제나 저제나 꽃의 개화가 기다려지는 것은 만개의 환희를 이미 맛보았기 때문일 것이다.몽우리가 점점 커지면서 알알이 꽃필 준비를 마치면 두근두근.
올 때의 설렘만큼 만개의 환희도 길다. 솜씨가 좋은 금손의 능력자가 하나하나 정성스레 빚는다 해도 이처럼 예쁘게 빚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따뜻한 볕과 솔솔 부는 바람, 자연과 호야가 해낸 일. 가까이 보아도 예쁘고, 멀리 보아도 예쁘다. 오래 보아도 예쁘고, 스치듯 보아도 예쁜 호야꽃을 올해도 이리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이 자리에 있다. 오고 가는 환자분들을 기억하는 식물들과 첫 마음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누군가, 병원에서 하루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또 누군가와 환자분들의 아픔이 낫길 바라는 마음으로 식물들을 돌보는 누군가가 이 자리에 있다. 비록 이 마음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수두룩하게 일어나기도 하지만, 마음을 알기 어려운 세상에서 적어도 이 마음을 아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으로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 보며 그렇게 또 한 번의 호야꽃을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