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있었지만 따뜻함과 가족은 없던 식사자리
부모님은 늘 바쁘게 사셨다. 일 년 중 설 명절을 포함해 겨우 엿새를 쉬셨으니, 사실상 쉼 없는 나날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셨지만, 65세가 넘은 지금도 여전히 일을 하고 계신다. 바쁜 부모님 밑에서 자란 우리는, 어딘가 소속감은 있었지만 따뜻함은 익숙하지 않은 늑대 새끼들 같았다.
삼 남매는 자주 다투고 상처를 주었지만, 그 안에서 세 살 많은 언니는 보호자이자 부모의 역할을 해왔다. 하루하루가 불공평하게 느껴졌고, 어른들에게서 배우는 사람을 대하는 법과 성숙한 인간관계는 아쉽게도 배울 시간이 없었다. 우리는 늘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했고, 세상은 부당하다고 느꼈으며, 조금의 위협에도 고양이처럼 잔뜩 몸을 부풀려 대응하곤 했다.
부모님 덕분에 흰쌀밥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분명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그 밥상 위에 함께 웃고 나눈 따뜻한 기억은 많지 않았다. 누군가 우리를 바라봐 주고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고 시간을 보냈 더라면 어땠을까. 하물며 식물도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큰다던데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으니 우리는 제멋대로 자랐고, 언니는 고등학생 때부터, 남동생은 중학생 때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집보다는 밖이 더 편했고, 이상한 소속감을 주는 또래 무리들과 어울리곤 했다.
부모님은 돈을 벌었지만, 우리와의 따뜻한 시간과 함께 쌓을 수 있었던 추억은 그만큼 잃으셨다. 삼 남매가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자, 이제는 우리가 부모님처럼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각자의 삶에 쫓기던 사이, 부모님은 어느새 우리의 시선과 마음이 필요한 나이가 되어 계셨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어떻게 사랑을 주고받아야 할지 서툴기만 하다. 받지 못했던 것을 돌려주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는 걸 느낀다.
어릴 적, 나는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도 간절했다. 하루를 함께 나누는 저녁 식사, 주말의 평범한 대화. 나는 자연스레 '돈이 곧 사랑'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부모님의 사랑은 언제부턴가 우리에게 ‘돈’으로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왜냐면 부모님의 관심과 시간이 돈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존재는 그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소중하고 따뜻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가족에게 사랑은 ‘얼마나 돈을 쓰느냐’로 측정되곤 했다. 부모님이 돈에 몰두하는 시간, 가족은 점점 뒤로 밀려났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의 외도, 어머니의 분노와 짜증은 사랑에 굶주렸던 아이들에게 점점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그런 날들이 너무 오래 지속되었고, 우리는 점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되었다.
얼마 전, 남편이 내게 물었다.
“지금까지 받았던 선물이나 생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뭐야?”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유치원 때 받았던 20색 크레용.”
그 말을 꺼낸 순간, 생일파티 저녁 식탁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남편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야구를 보러 갔던 생일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가 학교까지 찾아와 “오늘은 학교수업 빠지고 우리 야구 보러 가자”라고 말하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나는 그런 기억이 없다. 부모와 단둘이 보낸 시간도, 생일날이라고 해서 특별한 기억이 없다. 고등학교 때, 봉투에 담긴 3만 원 정도의 용돈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당시엔 큰돈이었지만, 어떻게 썼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그저 지나가듯 흘려보낸 순간이었을 것이다.
완벽한 가족은 없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하고, 조금씩 이해하려 한다. 누구나 서툴게 사랑하고, 때로는 외면하고, 때로는 후회하며 살아간다. 우리 가족도 그랬다. 부모님은 그들의 방식대로 최선을 다했고, 우리 삼 남매는 그 틈에서 나름대로 살아남으려 애썼다.
이제는 그 불완전함을 탓하기보다, 앞으로의 시간을 어떻게 채워갈지를 생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