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천송반야경
1. 반야
반야의 의의
처음부터 경전은 친숙하게 다가가기 힘들지만, 경전을 꿰뚫어 보는 안목이 한 번 생기면 어려운 내용이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된다. 흔히 불교에서는 독송의 공덕을 강조해도 무조건 읽기를 권하지 않는다. 소설책 읽듯이 그렇게 불교 경전을 재밌게 읽기 위해서는 먼저 그 만한 그릇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누구나 ‘아-그렇구나!’ 하는 경전을 이해하는 뛰어난 예지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예지력은 남을 이해시킬 수 있는 힘도 함께 가져다준다. 예지의 빛은 준비되어 있는 만큼 다가온다. 예지의 빛은 내가 남을 안내하기 위해 무언가를 준비할 때, 즐겁게 할 수 있는 힘도 같이 생기게 한다. 그 힘이 나에게만 머물러 있을 때 ‘소승에 머문다’ 하고, 상대에게 머물 때, ‘대승에 머문다’고 한다. 상대의 대상이 무한히 넓혀지는 것이 대승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을 상대할 때 누구에게나 다 행복해질 수 마음가짐, 생각 모두가 반야의 지혜라 할 수 있다. 반야의 동의어는 곧 지혜이다. 과연 지혜가 전부일까? 좀 더 생각하면 약간 부족한 감이 있다. 반야를 생각할 때는 늘 이것이 무엇일까 끝까지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불교식 사고는 대상을 꾸준히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하는데 이것을 염念한다 라고 한다.
반야는 사랑, 보시, 뿌듯한 기분, 진리, 진리 중에서도 내가 깨달았을 때 내 주위 생존체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그런 뿌듯함이 느껴지는 진리를 통틀어 말한다. 누군가 반야의 힌트 하나가 8천개에서 2만 5천개 등 무한히 늘어난다. 그래서 반야경의 종류도 8천송 반야경, 2만5천송 반야경, 10만송 반야경이 있다.
경전에 숫자가 많은 것은 반야는 오직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야의 의미를 하나로 정하면 곧바로 오해가 생긴다.
/반야는 바로 이거다/ 대신 /글세.../는 허용된다. /바로 이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과는 간혹 논쟁을 하게 된다. 반야는 논쟁거리가 아니라 모든 걸 포용할 수 있는 느낌을 강조한다.
반야가 아무리 많아도 반야의 속성은 하나같이 착하고, 즐겁고, 뿌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반야를 지혜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지혜로 이해하면 잃어버리는 부분이 커져서 원어 그대로 반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반야는 알음알이, 지혜와는 분명히 구분하여 이해해야 한다. 반야는 무한히 진화되어, 진화의 끝이 반야바라밀이다. 바라밀이 가진 의미는 완성된 상태를 말하며, 피안으로 건넌 상태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