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목표
불교의 목표
불교도 목표도 있고, 꿈이 있습니다. 바로 번뇌의 불씨가 꺼진 니르바나, (nirvāṇa) 곧 열반이다. 우리는 언젠가는 힘이 빠지면 꺼질 것이다. 문제는 힘이 다 빠지기 전에 내가 만났던 만남과 경험 속에서 일체 지혜인 부처님의 지혜도 만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현실에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힌트를 주는 소설들이 성공하고 있다. 살던 곳이 너무 지긋지긋해서 떠났던 곳에 깨달음을 얻어 다시 돌아오는 영화의 소재도 있다. 부처님께서도 히말라야로 가셔서 다시 돌아오신 과정도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의 행상들이 전부 반야바라밀의 한 소재거리가 된다. 경전에서 자주 나오는 일체지성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이다. 대개 초등학교 때는 이 세상을 전부 아는 자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누구든 세상 모든 진리를 알고, 이해하고 싶었던 시절이 있는 것처럼 불교도 그런 길을 각오한다. 반야를 얻지 못하면 일체를 모두 아는 자의 속성으로 가기 힘들다는 것이다. 오늘도 반야를 경험하신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대부분 반야를 경험하고 살고 있다. 여러분들이 붓다의 세계로 가까이 가고 싶으면 유연해져야 한다. 불교에서 수행자의 마음 조건 중 하나가 완고하면 안 된다고 한다. 마음이 유연한 자가 반야를 잘 느끼기 때문이다.
공(空)과 불퇴전 보살
욕망도 다하고, 깨닫겠다는 욕망도 다해야 한다. 하지만 아라한이 되기도 전에 욕망이 다하면 안 된다. 욕망이 다한 경지를 공(空)이라 할 수 있다. 노력도 하기 전에 공(空)을 만나면 안 된다. 아라한은 무수한 노력을 통해 성자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다. 성자의 경지에 도달하면 욕망이 다하고, 번뇌가 멸한 특징이 나오는 것이다. 번뇌는 어려운 말이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번뇌는 반드시 무언가 바랄 때 일어난다. 신기하게 내가 바라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번뇌의 원인이 자신인 줄 모르고 자꾸 밖에서 찾고 있다. 밖에서 찾고 있는 자신을 알아채는 순간 깨달음이 온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마음의 자유와 지혜의 자유를 이룬 깨달은 성자들의 특징이 나타나게 된다.
깨달음으로 가고자 하는 모든 노력들이 마지못해 참고 하는 짐처럼 느껴지면 작은 성자로만 그치는 것이다. 대승의 짐은 사실 짐이 아니라 중생 그 자체이다. 깨달음으로 향했던 수많은 노력들이 짐처럼 무겁지만, 무거운 짐을 벗어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짐을 다시 짊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짐은 아예 없는 것이 아니다. 깨달은 성자는 생존의 결박이 끊어지게 되는데, 결박이 끊어지는 순간 시원해진다 결박은 ‘아이고! 내가 왜 살아!’할 때이다. 즉 태어난 것에 대한 고뇌를 할 때이다. 내 자신에 대한 욕망이 사라졌다면 결박도 없을 것이다. 결박은 바르게 알게 되면 사라질 수 있다. 바른 앎으로 마음이 해방되어, 바르게 경험하고, 바르게 눈치 챘다면 마음이 자유롭게 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자유로워지기 힘들어 진다. 힘든 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옛날 들도 힘들었다. 바르게 안다는 것은 바르게 반야를 얻었다고 하고, 바르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또는 바르게 눈치 챘다고 한다. 이런 것들이 무수한 반복으로 쌓여 공(空)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마음이 자유롭지 않을 때 우리는 여행을 한다. 여행에서 무언가 얻어 낸 자는 집으로 돌아가도 그전의 인물은 분명 아닐 것이다. 경전에 나오는 일체지는 세상의 속성을 다 이해한 자 이며, 일체를 아는 자, 역시 모두 붓다를 말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넓은 의미가 있다. 일체지(一切智)는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모든 것들의 성질이다. 열심히 사는 사람은 많은 반야를 만날 것이고, 사람을 적게 만나면 덜 만나는 것이다. 그 사람의 활동건수에 반야의 횟수도 틀려진다. 많은 반야를 만나기 위해서 그래서 적극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불퇴전 보살이다. 반야를 만나기 위해서 불퇴전하는 것이다. 물러나는 순간 못 만나게 된다. 반야는 적극적으로 달라붙어야 만날 수 있다.
불퇴전 보살이 된다는 것은 굉장히 무서운 선언이다. 불퇴전 보살이 되었으니 절에 매일 나가야지, 매일 삼천배해야지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스스로 피해 왔던 것들과 부딪혀 물러나지 않는 자가 되었을 때 불퇴전 보살이라 할 수 있다. 노력하는 보살과 불퇴전 보살은 다르다. 살면서 만나는 현상들이 나로 인해 선량한 결과가 되었다면 반야라고 말할 수 있다. 반야는 횟수가 중요한 게 아니다. 한 번의 반야로 온갖 것을 포섭할 수 있다. 물러나지 않는다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면 부담스러워질 것이다.
반야를 실천하는 사람을 보살이라 한다. 보살은 바로 여러분이다. 보살은 깨달음의 속성을 지닌 유정이란 뜻이다. 현상 세계에서 무집착을 배우는 자를 말한다. 우리가 반야사상을 배우고 불교 신앙을 갖는 것은 집착하지 않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여러분들은 불퇴전의 노력만 할 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보살은 유정의 군단을 이끌어간다. 유정의 군단이라 해서 많을 필요는 없다. 고양이 한 마리도 군단이 될 수 있다. 우리의 목적은 일체지성에 도달하는 것이지만 일체지성을 구한다는 마음조차 없어야 한다. 즉 가는 곳은 뚜렷하지만 가는 곳에 대한 집착이 없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고양이를 구했으면서도 구한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구했다는 결과로 무언가 바라는 집착이 생기기 때문이다.
위대한 갑옷- 반야
채선후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