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흐리다. 비가 올 거 같은 하늘속에서도 가을의 맑음은 숨길 수 없는 날이다. 오늘 공연은 어떨까.
좋은 공연장에 사는 것이 행운처럼 여겨진다. 남도국악원 버스가 조금시장 쪽에서 왔다. 다른 날과 다르게 어르신들이 여럿 탔다.
남도국악원에 도착했다. 자그마하게 노란빛 몽오리가 올라온 소국 화분이 현관 입구에서 반겨주었다.
예매표를 받아서 2층으로 갔다. 여름부터 엘리베이터를 새로 공사했다. 세균 소독이 저절로 된다고 한다.
외국인들이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공연순서에 세계민요연주가 있었다. 허문 선생님의 장막 그림이 내려있었다.
드디어 막이 올랐다. 첫 연주는 <상령산> 영산회상은 세 가지가 있는데 현악기 중심의 <현악영산회상>, 관악기 중심의 < 관악영산회상>, 현악영산회상을 4도 낮게 연주하는 <평조회상>이다. 오늘 연주는 현악기 중심 <상령산>이다. 영산회상이라고 하니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 영취산에 모인 것을 기린 음악이다. 석가모니의 염화미소를 담은 의미를 새기고 있어서 거문고, 가야금이 들뜨지 않은 음으로 조용히, 천천히 흘렀다. 영산회상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지루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악기로 <세계민요>를 연주하니 편하고 다정하게 들렸다. 아리랑부터 노래는 즐겁다, 메기의 추억, 라쿠가라차, 진도 아리랑까지 어릴 적 듣던 곡이라 반가웠다. 세계인들에게 우리의 악기로 연주하는 노래가 정감있을 거 같았다. 피아노와 서양 관현악 연주로 듣는 거 보다 세련되고, 음감이 새로웠다.
세번째 순서는 <타루비>. <타루비>가 이렇게 슬픈 내용인 줄 몰랐다. 심봉사가 인당수에 빠진 심청을 그리워하며 통곡하는 대목이다. 소리꾼은 소리 뿐 아니라 통곡하는 아비의 심정을 온 몸으로 보여주었다.
네번째는 <산조춤> 무대다. 무대 뒷 배경 스크린이 홍매화 가지가 그려진 그림이 가득 채워졌다. 허형의 그림일까. 어디서 본 그림인데 기억나지 않았다. 메마름 속에 점처럼 핀 붉음이 더욱 아름다웠다. 그림과 함께 붉은 한복을 입은 무용수의 춤이 시작되었다. 손과 춤. 그리고 음악이 피어나는 매화꽃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바라보았다.
<새타령> 가사는 참 흥미로웠다.
새가 새가 날아든다. 온갖 잡새가 날아든다아!
나풍꽃아 떨치나니 구만장천에 대새
문광이 나 계시니 기산조양에 봉황새
무한기우 깊은 회포 울고넘는 공작새
소선적벽 칠월이야 우연장명 백학이
글자를 뉘 전하리 가인상사 기러기
생증장액수고란 어여쁠사 채란새
약수 삼천리 먼먼길 서왕모의 청조새
위보가인수기서 소식 전든 앵무새
성성제열 염화지 귀촉도 불여귀
새에 대한 꾸밈말이 정말 재밌다. 들을수록 옛 선조들의 언어 조탁이 참으로 밝다는 생각을 했다.
여섯째 무대는 춤이다. <화관무> .1947년 김백봉의 초연은 '고전형식'이라는 제목으로 독무였다고 한다. 그 후 궁중정재 복식에 화관을 쓰고 긴 짙은 자줏빛 한삼을을 입고 춤을 추었다. 양손에는 얼굴만한 분홍 모란꽃을 들었다. 마음이 화사해졌다. 과하지 않은 몸짓이 꽃의 움직임처럼 보였다. 가운데 왕비의 가래를 쓴 무용수를 중심으로 춤사위를 보면서 설총의 <화왕계>가 떠올랐다. 객석은 외국인들의 '멋있다'는 환호와 탄성으로 가득했다. 참으로 멋진 공연이었다. 우리가 가진 전통의 아름다움에 괜히 어깨가 으쓱댔다. 이런 굉장한 아름다움이 있었구나!
마무리는 역시 사물놀이다. <삼도농악가락>이었는데 장구와 징, 쾡과리, 북 장단이 모나지 않게 잘 어우러진 소리의 조합이 이렇게 신나고 북소리가 힘이 있으면서 부드럽게 휘몰아쳐 큰 장단이 되었다. 큰 힘속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을 발견하게 된 연주였다.
좋은 연주는 행복을 준다. 보고, 듣는 것으로 행복이 스민다. 좋은 가락과 아름다운 움직임을 선사 받은 공연이었다. 이런 공연이 공짜라니! 대한민국, 우리나라 참으로 좋은 나라다. 좋은 공연으로 행복을 주는 남도국립국악원 직원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그리운 것은 산위에도 있겠지만 행복한 것은 남도국악원에 있다. 가을이 성큼 왔다. 벼들이 부쩍 누래졌다. 시월은 이렇게 무르익고 있다. 행복한 주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