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20230126

에드먼턴, 캐나다

by Martine sk Mardres

집에서 혼자 점심을 먹는다. 혼자 먹는 중년의(?) 전업주부 점심이 뭐 그리 특별난 게 있겠는가. 정말 귀찮을 때는 공복을 유지하기도 하고 부엌을 둘러보다 눈에 걸리는 바나나 한 개 까서 먹고, 바나나 먹고 나니 배가 더 본격적으로 고파져서 사과도 하나 더 깎아 먹고, 그래도 성이 안 차 결국 라면 꺼내서 끓이고 계란까지 하나 톡 까서 넣고 매콤한 국물에 찬 밥까지 말아먹는 사달을 내기도 한다. 맛있었지만 후회막심한 라면정식 먹고 나서는 인스타에 '명절 끝나면 라면!'이라고 라면 항공샷을 올리면서 후회하는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현실과 가상공간의 괴리가 이렇게 크다.


먹고 나서 후회하는 점심 말고 오늘은 나에게 대접하는 마음으로 나만을 위한 한상차림 시작해 본다. 그래봐야 냉장고에 전날 먹고 남은 오이 무침 반찬 꺼내고 설날 쓰고 남은 소고기와 두부 고명에 호박 반 개 잘라서 마늘가루, 맛소금 넣고 볶은 후 김 좋아하는 애들한테 늘 양보하느라 정작 나는 맛도 못 본 김 꺼내서 잘라둔다. (쒸익쒸익! 김 한 봉지! 너 오늘 다 죽었어!) 계란 노른자 탱글탱글 터지지 않게 잘 부쳐서 화룡점정 중앙에 배치한 후 노란색 위에서 더 존재감 발휘하는 검은깨 토도독, 참기름 한 바퀴 휙 둘러주고 나니 비빔밥 한 그릇 완성이다.


역시 비빔밥에는 고추장이지! 냉장고 굴러 다니던 남은 반찬 처리는 늘 내 차지이지만 마지막에 매콤한 고추장 넣어서 쓱쓱 비벼 주니 입에 넣기도 전에 침이 고인다. 설날 손님맞이용으로 특별히 비싼 몸값 지불하고 모셔온 옻칠 잘 된 나무 수저 꺼내고, 디자인도 좋고 가격까지 착해서 발 동동 구르며 현실비명 지른 후 쓸어 담았던 이케아 냉면 그릇에 색감 좋게 잘 담아낸 비빔밥을 앞에 두니 어느 한식당 비빔밥 한상 부럽지 않다. 누군가와 같이 하는 점심도 좋지만 말 많은 내가 대화하느라 막상 먹는 데는 소홀하기 십상이라서 찬찬히맛을 음미하면서 먹기는 쉽지 않았던 터라, 혼자 조용히 천천히 씹어가며 나만의 식사를 즐기는 이 시간 마음이 충만해진다.


어떻게 보면 참 빈티 나는 빈티지 한 집에 가짜 빈티지 소품이지만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이랑 참 잘 어울리는 LP플레이어에서 나오는 라디오 소리를 BGM 삼고 창 밖을 본다. 30여 년 전 중고등학교 시절 참 많이 듣던 스키드로 노래가 흘러나온다. Skid Row는 1986년부터 활동하던 헤비메탈 밴드지만 대놓고 서정적이고 로맨틱한 I remember you를 제일 좋아한다. 오호라 두 번째로 좋아하던 Guns N'Roses의 November Rain까지 연달아 나온다. 오늘 라디오 선곡 최고다. 헤비메탈 창법으로 부르는 로맨틱 끝판왕. 이런 뒤통수치는 거 너무 좋다.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으로 오래오래 기억되었으면 좋겠고 다들 때때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가사까지 지금 기분에 딱 맞춘 듯하다. 지금 기분 이어나가면서 현실로 돌아와서 설거지옥 들먹거리지 말고 설거지거리 쌓이기 전에 바로 해야지. 빈개수대 쳐다보며 기분 좋을 준비 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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