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말. 재개발로 인한 이주가 시작되던 이문동 모습. 지금은 철거되어 사라진 풍경.
무라카미 하루키의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너에게"라는 짧은 글을 다시 읽어보다가, 유달리
"....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설레던 이성으로부터 지루함을 느끼는 순간이 있고
분신인 듯 잘 맞던 친구로부터 정이 뚝 떨어지는 순간이 있고
소름 돋던 노래가 지겨워지는 순간이 있고
자기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그저 짝사랑에 불과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
의 문단 중 "분신인 듯 잘 맞던 친구로부터 정이 뚝 떨어지는 순간이 있고"에서 눈길이 한참 머물게 되는 무더운 8월의 첫날, 월요일입니다.
살면서 함부로 인연을 쉽게 맺으려 하지도 않았지만 한번 맺은 인연에 대해서는 진정성을 다해 마음을 표현하고 의리를 지키고자 애를 쓰는 것은 중요한 내 가치관 중 하나입니다. 한편으로 보면 너무 많은 인연은 나에게는 부담스럽기 때문에 적정한 거리를 두고 그 거리만큼의 애정은 자기 보호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인간인지라, 내가 원해서 맺은 깊은 인연이 몇몇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의 몇 번의 실패 경험을 통해 나름의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 원칙을 문장으로 정리해 보자면,
첫째, 가장 가깝고 믿는 사이일수록 예의를 다한다.
둘째,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만큼 돕는다.
셋째, 그들이 손을 내밀 때를 기다린다. 손을 내밀지 않는다면 그저 같이 옆에 있어준다.
넷째, 그들이 싫어하는 것은 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는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첫째 원칙은 자칫 정신 차리지 않으면 가까운 사람에게 쉽게 상처를 줄 수 있는 행동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내가 싫은 것은 상대에게도 하지 않으려는 주의는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렇게만 잘 지키고 애를 쓰면 귀한 인연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은 지금 생각해보면 오만이었구나 합니다. 인연이란 서로를 끌어당기는 그 힘이 다하는 때가 오는 것이 순리임을 잊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표현처럼 "분신인 듯 잘 맞던 친구"와 올해 초, 나는 단절을 했습니다. 스무 살 때 처음 만나서 대학교를 졸업한 후 오히려 더 친해져 서로가 서로에게 참 진심으로 대한 사이였습니다.
그 오랜 시간 속에 서로의 역경을 지켜보며 든든하게 옆을 지키는 사이였고 특히, 내 방황의 시기에 아주 위험한 생각을 결심하려던 그때에 밖으로 나를 끌어내 준 은혜를 잊지 않고 두고두고 갚았습니다.
단절한 인연이어도 그 시절의 고마움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인연의 힘이 강할 때에는 그녀가 내게 하는 실수와 무례가 아주 사소하게, 그녀의 개성이며 오지랖 정도였는데 인연의 힘이 다한 때에는 나를 휘청이게 했고 곱씹어보게 되며, 복잡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최근 3~4 년간 인연을 고민하게 하고 주저하게 하다가 어느 한 사건을 계기로 결국 매듭을 짓게 되었습니다.
그때, 깊은 인연이 도리어 나의 정신과 마음을 어지럽히는 번민이 된 것에 대한 허탈함으로 애매할 때, 나를 다잡아 준 단어가 "시절인연(時節因緣)"이었습니다.
<맑고 향기롭게>라는 가난한 절 길상사와 이 땅의 텅 빈 사람들에게 법정스님이 보내는 메시지의 첫 단락인 그 단어는 사물의 현상은 시기가 되어야 일어난다는 말을 가리키는 불교용어입니다. 즉 인과 연이 합하여질 때가 인연이 시작되는 때이고, 인과 연이 흩어질 때가 바로 인연이 끝나는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나에게 찾아와 좋은 인연으로 찾아온 것도 시절인연이며, 인연이 다해 나를 떠나가는 것도 시절 인연이니, 잘 다독여 보내주는 것도 필요하다는 법정스님의 글이 오랜 인연이 떠나갈 것에 대한 나의 두려움을 달래주었습니다.
오랜 친구를 끊어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어찌 없었겠습니까?
인디언의 단어에 "친구"는 "내 슬픔을 등에 진 자"라고 하는데, 때때로 찾아올 슬픔과 두려움이 미리 걱정되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그 단절에도 위안이 되었던 것은 나는 그녀와의 인연에 매 순간 진심이었고 최선을 다했으며 예의를 지켰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녀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빚이 없습니다."(이 말은 그녀에게도 해주고 싶은 마지막 말입니다.)
더 인연을 이어가는 것이 번뇌를 키우며 이어가는 것이라면 서로를 더 이상 미워하며 원망하지 않을 수 있는 순간에 잘 보내주는 것 또한 성숙한 자세가 아닐런지요.
내 어머니는 인연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름을 듣기만 해도 마음이 쓰이고 애틋하게 뭉클하던 사람의 소식에 마음이 더 이상 애틋해지지 않을 때, 그것은 인연이 다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 순간에 와있음을 알고 그녀와 나를 아는 제삼자에게 '단절'을 알림으로써 비로소 완전히 인정했습니다.
지나간 인연을 원망하고 비난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은 오롯이 "당한" 사람으로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 원망과 비난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와, 나이 들어가는 얼굴에 흔적을 남깁니다. 그런 흔적을 새기고 사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되면서 잘 나이 들기 위해서는 원망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간절함을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