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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의 서
29화
끌림의 서 Chapter 3 나누어 짊어지는 두려움
가을을 맞이하는 자세
by
지영Robin
Sep 23. 2022
Daniel Spoerri <Hahn's Supper, 1964>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눈을 감으면 마치 방금 있었던 일인 것처럼 생생합니다. 크게 꼭 기억해야지 하는 의지는 조금도 섞이지 않아서 신기하기도 합니다.
그렇듯 뇌에 각인된 듯한 장면들은 내 삶에서 각각 어떤 주제를 가진 페이지가 될 수 있을까 가늠해보는 오늘입니다.
오늘은 추분입니다. 가을맞이 잘하고 있으신가요?
그제는 새벽녘 일찍 깨어나 잠이 신통치 않더니 어제는 꽤 깊이 달게 잘 자고 일어났습니다. 커튼을 걷고 문을 여니, 한층 더 서늘한 공기가 집 안으로 훅 끼쳐 듭니다.
어제도 선선했지만 오늘은 더 서늘하게 느껴진다 했더니, "추분"이라는 알람을 보고 나니 역시 "절기의 마법"이구나 했습니다.
나는 이 시절의 공기에서 묘한 내음을 맡고는 합니다. 이른바
'방랑자의 후각'
이라 이름 붙이고 싶은 그런 가을의 내음입니다.
2005년 9월 , 방랑을 계획하며 배낭을 메고 떠났던 그 시기에 낯선 곳에서 맞이한 가을이 후각에 깊이 저장되어있나 보다 합니다.
그때가 언제인데 아직도 여전하니, 인간의 기억에 후각이 얼마나 끈질기게 살아남는지 알 수 있습니다.
거기다 오늘 추분이라고도 하니, 그때의 감성에 빠져봅니다.
그 해, 9월 마지막 날 나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MOMAK에 있었습니다. 테마는 방랑이었지만 그래도 부주제는 미술관 탐방이어서 거의 하루 종일 미술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하루 일과였습니다.
전공자이지만 책이나 슬라이드로만 보던 작가의 작품을 실제로 보게 되는 설렘은 정말 만나고 싶은 스타를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다른 것의 압박이 없으니, 마음에 드는 작품 앞에서는 넋을 놓고 시간을 보내는 일상은 최고의 호사였습니다.
그 길을 가는 것을 포기했지만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을 알아보고 향유할 수 있으니 얼마나 큰 복인가 생각도 그제야 들었습니다.
그러다 2005년 9월 30일 오스트리아 비엔나
MOMAK 3층 기획전 [Nouveau Realism-Art and Reality in the 1960s]에서 본 저 다니엘 스포에리의 작품 앞에서는 알 수 없는 그리움과 안온함 때문에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당시 갖고 간 디지털카메라는 400만 화소, 일명 '똑딱이'로 불리던 것으로 수동 조작으로 빛 조절 등을 최선을 다해 찍음)
Hahn이라는 사람이 사람들을 초대해 식사를 한 후 그 저녁 식탁을 그대로 옮겨 붙인 작품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나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먹다 남긴 빵, 대화를 하다 커피 잔에 비벼 끈 담배꽁초, 수 차례 채웠다 비웠다 했을 와인잔, 접시에 남은 소스, 누군가는 아직 더 먹으려고 포크와 나이프를 그대로 둔 것, 먹다가 남긴 디저트 조각 등을 보면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여행을 떠나 즐거움도 있지만 낯선 나라에서 느끼는 긴장감과 외로움이 왈칵 쏟아졌던 모양입니다. 또 전혀 모르는 언어에는 완전히 문맹이었으니 그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 모릅니다. 영어라도 나오면 얼마나 반갑던지요.
그러니, 저 식탁에서 들리는 소리는 한국말이고 그리운 이들이 있는 환영이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훌쩍 지난 12월 초, 한국에서 Hahn's Supper와 같은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2014년 12월 6일, 홍대 앞 한 비스트로
에
서의 브런치였습니다. 친구들과 전날 송년회를 이어 브런치까지 하고 헤어지는 일정이었습니다.
다들 집에 가기 위해 일어난 자리를 보자, 데자뷔를 본 듯했습니다.
Hahn's Supper는 부러움이 가득 찬 초대받지 못한 창 밖 성냥팔이 소녀였다면 비스트로 브런치에는 따뜻함, 웃음, 포만감, 왁자지껄함이 모두 내게 속한 것
이었습니다.
여전히 이 계절은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방랑 욕구가 솟구칩니다. 다만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을 뿐.
그래도 언젠가 내가 거기 있었음을 떠올리는 것으로도 가을을 추억할 수 있습니다.
그러하니, 당신!!
가을을 추억할 따뜻함과 웃음을 만드시길.
언제든 그리워질 때 불러올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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