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란
어느새 시월입니다. 한 해가 익숙해지기도 전에 서둘러 떠나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여러분의 시월은 어떠하신지, 안부를 여쭙습니다.
한편 갑작스러운 상상을 같이 한번 해보시죠.
당신은 당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거의 강제로 떠나야 할 처지에 놓입니다.
배에 태워져 바다 건너 멀리멀리 가던 중,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서 조난을 당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배의 선장은 실력도 없이 인맥으로 정부에 의해 선임된 자로 무능한 자인데 승객을 놔두고 선장과 선원들은 구호선으로 도피했습니다.
나름 구호선에 먼저 가서 149명이나 되는 승객을 임시로 만든 뗏목에 싣고서 밧줄로 끌고 가기로 하는 작전을 세웠지만 무능하고 무책임한 그는 결국 그 밧줄을 끊고 도망을 쳤습니다.
당신은 적도의 태양 아래서 12일 동안이나 물도 식량도 없이 표류하며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고초를 겪습니다. 결국 구조선이 뗏목을 발견하고 구조한 인원은 오직 15명이었습니다.
당신은 그 15명에 속했을까요? 아님 나머지 134명이었을까요?
상상하기에도 참혹한 그 상황은 19세기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테오도르 제리코(Theodore Gericault)가 기자처럼 이 사건을 취재하면서 생존자를 만나 기아로 인해, 서로를 잡아먹기에 이르렀던 무시무시한 체험담을 <메두사호의 뗏목>이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대학 다닐 때는 프랑스 낭만주의 시기에 대해 배울 때, 스쳐 지나가듯 보았고 대학원에서는 한 학기 동안 그림에 대한 해석을 분분히 하며 지겹도록 봤던 그림입니다.
실제로 루브르 박물관에서 이 그림을 보고 차마 반갑다고만 하기엔 복잡한 심정이었습니다. 한 시간도 넘게 그림 앞에 앉아서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떠올리고 결국 인정한 것은 "희망"이라는 단어였습니다.
대학원 시절의 나는 "희망"이라는 단어에 매우 시니컬했던지라, 머리로는 이해한 그림이었으나 마음으로는 거부감이 드는 그림이었습니다.
논문 자격시험에서는 머리로 이해한 글을 그럴듯하게 적어냈지만 여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애증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러다 루브르에서 나는 내가 그림에서 어디에 시선을 두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은 저 그림 어디에 시선이 꽂히시나요?
상담을 하면서 이 그림을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은 대상을 만났을 때, 꺼내 들어 보였습니다. 좀 전에 여쭙듯이, 어디에 시선이 가장 먼저 가시느냐고.
널브러져 있는 시체?
체념한 듯이 턱을 괴고 앉아서 소리를 치는 사람들이 한심한 사람?
살기 위해 뗏목 위에 단을 쌓고 가장 높이 올라가 옷을 벗어 들고 소리치며 손을 흔드는 사람?
그 옆에서 같이 손을 흔드는 사람?
같이 소리치자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사람?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심리 상태를 반영해 그림 속에 시선을 먼저 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나 역시 그랬음을 루브르에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십자가가 있고(천주교 신자인 친구의 표현에 따르면),
누구나 자신만의 그림자가 있으며(심리학에서 말하기를),
누구나 짊어지기에 버겁고 무거운 짐이지만 함부로 내려놓을 수 없는 것(명리학에서 하는 말로),
누구나 업보가 있고(불교에서 가르치길) 등등 어딜 가나 각자 자신만의 지옥이 있습니다.
희망을 가지라는 말은 어느 때 적절할까요? 절망에 가슴이 찢기는 사람한테 가당키나 한 말일까요?
"희망"이라는 말처럼 시니컬한 반응을 일으키는 단어도 드물겠다 싶기도 합니다. 그만큼 누구나 가질 수는 있지만 아무나 갖지는 않는 말이기 때문일 듯합니다.
하여, 저 그림에서 가장 시간을 두고 한참을 찾으려 애를 써야 하는 것은 바로 여기입니다.
그들을 구하러 멀리서 오고 있는 구조선입니다.
눈여겨보지 않는다면 결코 보이지 않는 것, 믿지 않는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은 바로 "희망"이 아닐까 합니다.
희망이 왜 아무 때나 쉽게 찾아오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가장 두렵고 절망적이며 모든 것이 끝이라고 여길 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참 잔인하기도 합니다.
저 그림을 처음부터 좋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저토록 처참한 낭만주의라니, 외면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삶이 이토록 지옥이다 싶을 때, 종종 위안이 되는 그림이 되었던 과정 또한 지난했습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From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이만큼 살아온 당신의 시월에는 그래도 될 듯합니다.
그러하니, 당신!!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들지라도
당신의 시월은 눈이 부시게 푸르를 것인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