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쁠 이=怡 / 심을 재=栽, 그러니까 '기쁨을 심는다'라는 문장으로 이름을 만들었으니, "기쁨을 심는 사람" 쯤으로 하면 되겠다. 삶이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말하면 그건 순전히 사기라는 것을 눈치채는 건 태어나면서부터가 아닐까? 그래도 그러한 삶에 조금이라도 기쁨을 심어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면 대책 없이 낭만적이긴 해도 그럴듯한 바람일 듯 싶다.
이재(怡栽)는 좌충우돌하는 사람이다. 여전히 늘 흔들리는 사람이며 곧잘 넘어지고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배짱을 부리기도 한다. 시니컬한데 농담을 즐긴다. 그 농담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가 시니컬한지 잘 모른다. 실은 이재, 그녀의 속에서 한바탕 시니컬함이 휘저어진 뒤, 입으로는 유머와 농담이 되어 나오니, 그저 낙천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재(怡栽)가 몽상가라는 것을 잘 모른다. 말이라는 것을 하면서부터 그게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는 나이일 때부터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살았다. 곧잘 이야기도 잘 지어냈던 것 같은데 사람들은 매우 현실적이고 사실적이고 이성적인 면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오해하도록 하는 데 있어서 이재(怡栽)는 미필적 고의이다. 앞으로 그런 미필적 고의가 더 많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편 이재(怡栽)는 속이 여린 면이 많은데 한번 아니라고 생각하면 도마뱀이 꼬리를 끊어내듯, 단번에 잘라낸다. 우연히 점을 보러 갔을 때 만난 박수무당이 그럴 수 있었기에 제정신으로 살 수 있었다고 했다. 말하자면 그녀의 생존 방식인 셈이다.
그런데 이재(怡栽)는 지금부터 단번에 잘라내서 절대 돌아보지 않았던 것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보려 한다. 그래도 그 잘라낸 것에 오래 묵혀둔 그녀만의 정체성이 잠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것에 누구도 원망하지 않지만 뭔가 원망이 가득했던 그것으로 돌아가는 길에 발걸음 하나 떼어놓기가 쉽지 않아 내내 고민하다가 한 톨만큼의 용기를 내서 묻어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보려 한다.
말도 안 되는 것들을 말이 되도록 해보자 하는 것만이 지금 이재(怡栽)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