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영Robin Nov 02. 2022

이재 이야기

01. 점, 선, 면 그리고 시작

*


    이재는 2절지 스케치북을 앞에 두고 앉아있다. 하얀 종이가 막막해 좀 주눅이 들었다.  칼 세이건이 말한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에서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이라고 말한 게 이런 것일까?  시간의 영겁까지는 몰라도 공간의 광막함을 고작 2절지 앞에서 맞닥뜨리고 있었다. 깎은 4B연필을 들고 있는데 데생 강사가 오더니, 앞에 놓여있는 석고상을 보이는 대로 그려보라고 했다. 


   그 석고상은 각진 아그립파였다.  


   로마제국의 정치가이자 장군, 최초 로마의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의 오른팔이었던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립파(Marcus Vipsanius Agrippa, 기원전 63~ 기원전 12)는 자기가 죽어 2000년 정도 흐른 후에 자기의 두상이 각이 진 채로 모델이 될 것을 알고 있었을까. 


   2시간쯤 흐르고 나니, 광막하기만 하던 공간은 좀 채워졌는데, 그냥 광막한 채로 두는 게 나았을 듯싶다. 이재는 약간 수치스럽고 앞으로 감당해야 할 것들이 더 거대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데생 강사는 이재가 그린 것에 대해서는 별 말을 하지 않고, 갑자기 "점, 선, 면"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세상의 기본적인 요소가 "점, 선, 면"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으로 시작된 그 설명에 이재는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재가 아무 생각 없이 긋고 칠한 그것이 점으로 시작된 선이고 선이 무수히 그어져 면이 되는 그 과정에 대해서, 그리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1차원의 것을 가지고 2차원으로 옮겨서 3차원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러므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차원이 다른 일을 하는 것이라는 말에 이재는 순식간에 매료되었다. 


   그다음 날부터 2주일 동안 내내 선긋기를 팔이 떨어지게 하고 명암을 표현하는 기초적인 행위를 하는 동안  이재는 매우 진지하게 그것에 매달렸다. 기초가 단단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이재가 만들어갈 세계는 모래성 같을 수도 있으니, 숨 하나 내쉬면서도 조심스러웠다.


   조용하지만 낮게 타오르는 열정이 있었던 나날이었다.



**


   한편 이재, 그녀 자신을 들여다본다. 세상의 기본 요소에는 점, 선, 면이 있다면 자신의 기본 요소는 무엇일까?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인가?

  이루어진 구성이 나를 증명하는가?

  그 증명된 것이 비로소 나인가?


  이재가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 물어본다면 들려올 것들은 풍부할 것이다. 그들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재일 테니, 그 또한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다른 것이 있을 뿐.

  그런 질문들이 물방울 터지듯이 속에서 터져 나오면서 그제야 모든 철학과 예술, 삶은 그것들에 대한 고찰일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자신만의 것을 찾아가는 과정.  단순한 명제로 정의 내릴 수 있기 위해서는 수없이 복잡다단하고 지리멸렬한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깨닫는 이재였다. 


   또한 이재는 자신에게 수많은 점, 선, 면에 해당하는 것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수많은 점과 점 사이의 공통점, 공통점이 연결된 무수한 선, 그 선이 가득 채워진 면은 무엇일까. 

   

   그렇게 질문하다 보니, 그것들이 아직은 뭔지 모르겠지만 무척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하나도 하찮은 것이 없겠다 싶다. 나를 찾아가는 과정은 결국 나를 증명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지 않을까 이재는 생각한다. 그녀 외에 존재하는 타인도 마찬가지일 터. 


   이재는 그제야 어깨를 으쓱한다. 먼 과정을 떠나기 전 출발선에 섰으니, 따뜻한 녹차에 꿀 한 숟가락 넣어 마셔야겠다. 그게 그렇게 부기를 빠지게 한단다. 


   To be continued.


   

  

  

    


이전 01화 이재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