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4개의 계단을 통해 두오모를 올라오고 나니, 약속처럼 피렌체가 발아래에 있었습니다. 드디어는, 결국에 내가 여기에 왔구나 하는 생각에 깊은숨을 토해 냅니다. 나는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그럼에도" 해냈다는 것에 안도를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시간들을 엉금엉금 기어서, 오뉴월에 서리가 내리는 것 같은 냉정한 세상 속에서 상처뿐인 모습일지라도 내 발로 왔으니 그 환희는 그저 크게 숨을 내쉬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꾸폴라를 한 바퀴 돌고 자리 잡고 앉아 불어오는 바람 속에 피렌체 저 너머를 바라봅니다.
앞으로의 나는 분명 더 힘이 들 것이 분명하고 어려워질 인생이 앞에 놓인 것은 맞는데 그저 "괜찮은", 혹은 "괜찮을" 듯 싶은 막연한 기대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서른 살 증후군으로 인생 최고의 방황을 맞이하며 흔들리는 청춘이,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는 난감함이, 분명 맞닥뜨려야 하는 것은 인생 최대의 암흑일 것을 예감하는 순간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 저 때 딱 저 장면에서 나의 마음은 너무나 "괜찮아서", 제 인생 멋진 장면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사진으로 잘 기록해둔 듯합니다.)
당신의 그런 순간이 언제였을까요?
2000년대에 20대 중후반을 거쳐 30살을 맞이한 X세대에게 그 당시 트렌디한 문화 중 하나는 일본 소설이었고 그때 읽은 많은 일본 소설 중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의 "연애편지를 쓰듯, 써 내려간"-라디오 광고 문구인데 아직도 기억나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귀에 박힌 모양- 소설 "냉정과 열정사이"가 단번에 마음이 사로잡혔던 듯합니다.
그 "냉정과 열정사이"의 중요한 고리가 피렌체 두오모였습니다. 매우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 그곳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준세이(남자 주인공)와 아오이(여자 주인공)가 합니다. 젊고 어린 시절의 그 약속이 이 둘의 인생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데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남자 주인공이 계단을 오르고 기다리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소설 속에서 사로잡힌 것은 둘의 연애감정보다는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킬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갈등과 선택이라고 할까요? 그냥 지나가듯이, 젊었을 때 하는 공허한 말일 수도 있으니까요. 두고두고 소설 제목 잘 지었구나 생각했을 정도로 "냉정과 열정사이"는 마음에 많이 남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도 자연스레 무언가 결정하려면 피렌체 두오모에 올라가 볼까 했던 것이 중요한 버킷리스트가 된 것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결국 저는 30살에 다니던 직장도 자의 반 타의 반 그만두었고 시인 최승자 씨의 시구절처럼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가 딱 그때의 나였으므로 나의 선택은 배낭 메고 떠나보기였습니다. 떠나보면 무언가 계시처럼 그다음의 선택지가 놓일 거라는 대책 없는 낭만이 내가 가진 용기의 전부였습니다. 떠나서 걷을 때마다 그저 알 수 있는 것은 앞으로 쉽게 놓일 선택지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때에 저 두오모에서 제가 쓴 글이 있어 가져와 봅니다.
"올라와서 사진만 찍고 가기에는 너무 아까운 곳 아닌가.
벤치에 그냥 눌러앉아 피렌체 정경을 내려다본다. 준세이가 아오이를 기다리며 내려다봤을, 나도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기다리며 앉아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붉은색 지붕이 통일을 이루며 풍경을 만들고 있는 저 시선 끝에 초록색 산이 경계를 이루고 있으니 내가 무얼 생각하려 이 여행을 하는지도 잊는다. 그저 지금 두오모 꼭대기에 있는 내가 있을 뿐이다. 여행 전 이곳 사진을 보며 준세이처럼 결국 기다리던 그 무언가를 나도 얻으리라 생각했는데 그저 아주 작은 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에까지 생각이 미친다. 훗날 내가 이때를 떠올리며 벌써 얼마나 그리울 것인지도.
결국 기다리던 그 무엇이 오지 않아도 평화로웠을 것이라는 것을. 준세이가 아오이를 기다리며 그녀가 결국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을 것을 알 수 있었다."
선택의 결과는 시간이 지나 봐야 알 수 있습니다. 분명 저의 서른 살은 온통 암흑이었습니다. 누구 때문도 아닌 제 선택의 영향이었지요. 지금은 그 암흑의 시간이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어두운 밑바닥을 냉정하게 들여다보는 선택은 가장 열정적인 행동이 아닐까요?
신학자 윌리엄 바클레이는 행복한 삶에 없어서는 요건 세 가지가 첫째, 희망을 갖는 것. 둘째는 할 일이 있는 것. 셋째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 셋 중에 희망과 할 일은 좀 내버려 두자고요. 사랑하는 사람도 나를 먼저 두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