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떠다밀다시피 해서 아내를 내보냈다.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잠시라도 숨 쉬게 해주고 싶었다. 일요일 저녁이었고 서너 시간은 충분히 커버쳐 줄 수 있으리라 싶었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걸 맞닥뜨리는 데 까지는 불과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둘째 아이 영어 선생님이 휴가를 가셔서 내가 직접 과외를 하는 중이었다. 몇 번의 고비를 슬쩍슬쩍 넘기고 무사히 안착하는가 싶었다. "단어 열개만 외우는 건데 왜 스무 개나 숙제로 내줘?" 미리 선생님과 세운 계획표를 꺼내 들며 딸아이가 따져 물었다. "대신 문법 숙제는 안 내줬잖아. 하기 싫으면 너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해." 내 판박이와 지리한 싸움을 벌이기 싫어 내가 먼저 한발 뺐다. 그대로 순순히 물러날 아이가 아니다. 마치 내가 계엄령이라도 내린 표정을 짓더니 숙제 이야기로 끝없이 말꼬리를 잡는다. 이럴 때는 떨어져 있는 게 상책이다. 아이가 울든 말든 방문을 닫고 거실로 나와 뻗히는 열을 식혔다.
소파에 앉아 책 좀 보려는데 쿵쿵쿵 이번엔 큰 애가 공룡 발자국 소리를 내며 들락거린다. "쉬는 시간이나 화장실 갈 거 아니면 집중해서 좀 해." "아니, 물 한 잔 못 마셔?" 덥수룩한 머리 사이로 어이없다는 눈빛을 쏘아댄다. "들어가라." "어휴" 쿵쿵쿵 오분도 안 되어서 아들이 또 방에서 나온다. "왜 또 나와?" "물 쏟았는데 그럼 닦지 마?" 식혀가던 열이 다시 끓기 시작한다. 그래, 한 걸음 더 떨어져 있어 보자. 막내를 데리고 책이라도 읽어주러 안방으로 들어간다.
불과 두어 시간 만에 아내가 돌아왔다. 마사지받고 왔다며 모처럼 기분 전환한 모양인데 집안 공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채고 이네 굳은 표정이다. 내 편을 들어준다고 큰 애에게 한 소리 했다가 큭크윽 큭큭 듣도 못한 웃음소리만 온 집에 울려 퍼진다. '저건 분명 악마의 소리일 거야.' 참다못한 내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말았다. "이 썅놈의 새끼, 너 이 따위로 할래!" 아들 뒤통수를 내려친다... 오른쪽 눈가에서 콧등으로 흘러내리는 피. 주섬주섬 일어서서 떨어진 안경알부터 찾는다. 영혼을 잃어버린 아내의 눈빛과 "오빠 나빠"를 외치며 울부짖는 둘째가 피눈물에 섞여 흐릿하게 보인다. 막내는 자기 방에서 이불을 덮고 추이를 살피고 있다.
그래도 다행이다. 눈꺼풀이 붓긴 했지만 안경을 쓰고 있어서 큰 티가 안 난다. 마구 휘두른 주먹에 맞은 왼쪽 볼이 얼얼하지만 며칠뿐일 거다. 다만 엎드려 누운 채 발길질당한 게 창피할 따름이다. "너 미쳤어. 그만해!" "엄마 나 말리지 마. 내가 안 때림 아빠가 나 더 때릴 거야!" 아이의 절규가 귓가에 맴돈다.
맞아, 늘 이런 식이었다. 남자애니까,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욕을 뱉었고 손찌검을 했다. 처음에는 헛헛한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지만 횟수가 늘어갈수록 그 농도도 옅어졌다. 이래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상담을 받았다. 분노가 나를 삼켜 버리려거든 일단 자리를 피하라는 조언이었다. 분명 유용한 팁이었고 나와 남은 다르다는 주문을 외우면서 고비고비를 넘겼다.
그럼에도 임계치를 순식간에 넘어 버리는 때가 있다. 지 엄마보다 덩치가 커진 아들은 더 이상 당하고만 있지 않는다. 이른바 열 배의 법칙이 우리 사이를 지배한다. 내가 먼저 한 대 때리면 열 대 맞는 것. 엎드려 누워 아이의 발길질을 당하면서 요동치는 마음을 가라앉힌다. 절대 바람직한 교육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간 아이 마음에 쌓였을 울분을 그렇게라도 털어낼 수 있으면 하는 바램이다. 동시에 또 한번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나에게 스스로 내리는 형벌이기도 하다.
발길질이 잦아들고 정적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이년 여전 아들 손을 잡고 런던 시내를 누비던 때가 떠오른다. 타워브릿지가 열리는 걸 보고 싶다는 얘기에 밀레니엄 돔에서 사우스 뱅크 방향으로 삼십 여분 뛰었지만 결국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손바닥, 템즈 강변의 비릿한 내음, 서로 바라보며 웃으며 털어냈던 허탈함,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먹은 일본 라멘과 그날의 무용담을 안주 삼아 들이킨 기네스 한 잔의 묵직한 청량함까지. 그 기억에 기대어 지금 이 순간을 버틴다.
다음 날 눈가에 듀오덤을 붙인 채 출근했다. 다행히 물건 받는 날이어서 이른 아침부터 정신없는 하루가 시작된다. 산란해진 마음을 놓아 버리는 데는 무언가 다른 데 몰입할 게 필요하다. 어느새 날이 어둑해졌지만 집에 들어갈 면이 안 선다. 집 근처 연습장에 들른다. 뿔뿔이 쪼개진 마음을 따라 내가 친 공도 제멋대로 흩어진다. 실내 포장마차에서 수제비 대합탕을 안주 삼아 새로 한 병을 마시고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아빠, 안녕." 아들이 현관문 앞에 뻘쭘하게 서서 인사를 한다. 퇴근길에 아들 인사를 받아 본 게 얼마만인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코트만 간신히 벗고 침대에 눕는다. 추위에 숨죽여있던 취기가 그제야 올라온다. 방문을 빼꼼히 열고 아들이 내 옆에 누워 뒹굴뒹굴하더니 이내 자기 방으로 쿵쿵쿵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듀오덤을 떼어 손가락 사이사이 꼬깃꼬깃 접은 채 눈을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