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라 다른 가족은 면회도 되지 않던 그때.
내 옆의 사람은 다른 가족들의 몫까지 나를 챙기느라 고생했다. 때마다 내가 좋아할 만한 과일을 싸들고 오고, 묵은 속옷을 가져가 세탁하고, 새 속옷을 가져오는 일. 땀과 기름 범벅이 된 머리를 감겨주는 일도 모두 그의 몫이었다. 노부부가 된다면 겪어야 할 모습이 아마 이런 거겠구나 싶었다. 숙경과 영민이 해준다 해도 마냥 마음 편치만은 않을 일을 그가 해주는데 거북함은 없고 그저 많이 고마웠다. 신기한 일이었다. 우리를 둘러싼 성벽이 한 층 더 두터워지는 것 같았다.
나아갈 즈음에는 병실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삶이란, 끝자락에 다가설수록 살아온 생의 모습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나의 생을 잘 채우는 것. 그것이 앞으로 내가 해야 할 단 하나의 책임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아프고 나니 그 책임을 다하기엔 몸과 마음의 체력이 이전 같지 않았다. 축 쳐진 영혼의 그림자를 다시 춤추게 할 무언가가 필요했고, 그것을 찾으러 친구들과 3박 4일로 제주도에 다녀왔다. 제주에서 마주한 거대한 자연은 나를 다시 일깨워서, 돌아와서는 무엇이든 해봐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가을이 오는 소식에 맞춰 이웃과 함께 우리가 좋아하는 초록 잔디밭에 작지만 풍요로운 정원을 만들었다. 뜨거운 가을볕 아래에서 맨 손으로 여름내 자란 잡초를 뽑고 돌을 고르며 일구었다. 고된 육체노동이었지만 좋아서 한 일이니 그마저도 기쁨이었다. 정원이 완성되자, 평소에도 종종 ‘카페’로 오해를 받던 우리의 공간은 ‘근사한 정원을 가진 카페’로 오인되는 순간이 더 늘었다.
무엇으로 오해를 하든 중요한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다가와 주었다는 점이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해 주시는 분들을 보니 마음이 따뜻해지고 넉넉해졌다. 더 많은 것을 나누고 싶었다. 고민 끝에 우리는 행복하다고 느끼는 일상의 작은 부분, 소중한 순간들을 끄집어내는 프로젝트 전시를 이어가기로 했다. 행복한 순간의 모습과 단어들을 모아 전시를 만들어가는 순간은 준비 과정도 행복하게 고단하였다.
그날도 행복의 부분을 가득 모으다 퇴근을 한 여느 때와 같은 저녁이었다. 병원의 맛없는 밥 대신, 내 옆에 있는 이와 먹는 수수한 집밥이 행복이라 생각하며 지루한 설거지를 막 마쳤다. 물을 많이 마시라는 의사 선생님의 조언을 충실히 하기 위해 물 한잔을 따르던 참. 식탁 위에 올려둔 핸드폰 화면이 반짝였다. 급히 화장실에 가면서 잠깐 올려둔 그의 것이었다.
1초도 안 되는 사이.
밝아진 화면에 무심코 시선을 뒀던 그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울린 붕괴의 소리를 분명 들었을 테다. 지난 시간 동안 탄탄히 다져 올린 무언가에 거대한 균열이 일어난 순간이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요동쳤다. 1초 전, 평온한 마음으로 나를 위해 따랐던 물을 크게 한 모금을 들이켰다. 물이 식도를 훑으며 내려가는 순간이 느리게 느껴질 만큼 머릿속은 빠른 속도로 엉망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냉철하고 침착해야 하는 때. 위기를 감지하고 나를 지키려는 본능이 순식간에 각을 돋우며 살아났다. 병원에서 부단히 단련한 덕이었다. 어쩌면 인간의 본능이었을 수도 있겠다.
잘못 본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잘못 봤을 리가. 애초에 잘못 볼 수도, 오해를 할 수도 없는 사진이었다. 방금 전 1초의 순간이 자꾸 뇌리에서 팝업 되었다.
내가 제주 여행을 다녀오는 사이 남편은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하기로 했었다. 함께 취미를 즐기는 친구들이었고, 나도 함께 식사를 하거나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던 꽤나 오래된 관계였다.
꼬박 사흘 밤낮이 걸렸다. 삽을 들기로 결심하기까지. 들춰낸 뿌리 깊은 곳에 무엇이 있을지 두려웠다. 그렇다고 덮어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의 대답을 들을 각오가 서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남편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꺼냈다. 한동안 생기로 가득 찼던 그의 눈동자가 그제야 텅 빈 잿빛으로 굳었다.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아니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아주 쉽게 지옥 같은 나날이 시작되었다.
잦은 밤의 시간 동안 나는 메말라갔다. 온몸을 거미줄처럼 감싸고 있는 혈관의 말단부가 너덜거린 채 개방되어 있기라도 하는 듯이. 나의 말초는 바닥 어딘가와 연결되어 순환해야 할 모든 피가 맨 땅으로 무한히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좌심실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양 더 강하게 혈액을 뿜어대기만 했다.
그도 그 나름대로 밤을 지새우는 고민과 눈물로 얼굴이 퉁퉁 붓고 엉망인 몰골이 되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둘의 입장이 반대라 해도 믿을 얼굴로 그와 나 사이에 칠흑 같은 며칠이 흘렀다.
삽자루를 먼저 쥔 건 나였지만 들춰낸 후의 상황은 감당하기가 꽤나 버거웠다. 누구보다 상한 뿌리의 대처법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게 되니 생각보다 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식물의 뿌리가 썩거나 병충해가 생겼을 때 멀쩡한 원뿌리를 최대한 살려내는 선에서 병들거나 썩은 뿌리를 도려내야 한다. 쨍쨍한 햇볕에 살균하고 새 화분에 새 흙을 담아 정성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식물은 잘려나간 뿌리 때문에 잠시 몸살을 앓다가도 차츰 다시 살아난다.
하지만 병든 부위를 제대로 처단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어떤 정성의 시간을 보낸다 한들 그 부분으로부터 다시 문제가 생긴다. 조금 남아있던 원뿌리까지 침해되기라도 하면 결국 식물은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과감한 결단만이 답인 것이다.
나는 겁이 많은 편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한 화분에 키웠던 식물은 뿌리와 화분의 유착이 심한 법이기도 했다. 이 참에 묵은 뿌리를 툭툭 털어 정리하고 새 화분과 새 흙을 준비하면 되려나. 자그마치 13년이었다.
그러나 어떤 식물들은 한 번의 시련도 극복할 생각이 없다는 듯이 손 쓸 기회조차 주지 않고 빠른 속도로 뿌리를 망친다. 애초에 극복이 불가한 병해를 얻게 되기도 한다.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을 뿐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온 병해가 비로소 눈에 띄게 되는 경우도 있다. 허무로 따지자면 백 년 묵은 고목도 번개로 고사하는 것이 하루아침이니 그에 비하면 인과가 지당한 일이었을까.
나는 기반을 드러낸 이 관계의 생사를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병든 뿌리 위에 사는 식물에게는 다른 어떤 노력도 헛수고라는 걸 알고 있었다. 기가 막혔다.
그러나. 이게 말이 되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그였기에 말이 되는 것이 나의 비극이었다.
기어코 네가 나에게 이런 슬픔을 주는구나.
어느 여유로운 토요일 오후, 나는 이웃에게 참았던 숨을 토해내듯 고백했다. 행복만을 말하는 우리의 설레는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도저히 내 앞에 닥친 비통을 숨길 재간이 없었다.
웃은 그 자리에서 내 손을 마주 잡고 눈물을 흘렸다. 웃의 눈물을 보니 나도 따라 눈물이 났다.
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동생 둘을 위해 말없이 뜨끈한 차를 내렸다. 얇다란 창 너머로 이웃과 토닥여가며 심은 배롱나무 묘목에 검붉은 꽃이 핀 채 유유히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