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웃은 자매다. 이가 언니고 웃이 동생인데, 둘은 언뜻 보기엔 자매보다는 친구 같다. 언니인 이는 키가 작고 동생인 웃은 키가 크며, 언니인 이의 눈은 똘망하고 동생 웃의 눈은 그윽하다. 이 언니의 코는 오똑하고 웃 동생의 코는 날렵하며, 언니 이는 한국 배우의 새침한 턱을, 동생 웃은 외국 배우의 이지적인 턱을 가졌다. 피부톤이나 말투 같은 것으로 둘의 공통점을 찾기엔 자매치고 너무도 은근하고, 요목조목 뜯어보면 더욱 아리송한 이와 웃.
둘은 보이는 면 보다 느껴지는 면에서 확실히 닮았구나 하게 된다. 남들보다 예민하게 수용하는 공감각, 그리고 그것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섬세한 표현에서 이와 웃은 꼭 자매다. 인간이 각자의 특성에 따라 다른 모습을 갖게 된다면 이와 웃은 남들보다 몇 배 더 많은 감각기관을 가진 모양으로 그려질 게 분명하다. 촘촘히 표현하는 그들 덕분에 이웃과 함께하는 새로운 경험은 늘 즐겁다. 그들이 열어주는 풍부한 감상의 지평 덕에 내 감각의 세계 또한 넓어지기 때문이다.
이와 웃이 또 닮은 점이 있다면 둘 다 여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꼽고 싶다. 나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 문 두드리는 이를 반기는 쪽이라면 이웃은 울타리 밖에서부터 “계세요?” 하고 외치는 타입이다. 열린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문을 두드리고, 닫힌 문을 열리게 만들어 인사하는 쪽. 그날 우리가 만나자마자 이웃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웃의 여는 성질, 그 덕분이었다.
봄 비가 촉촉이 내리고 갰다. 점심을 막 넘긴 시간. 나는 저녁 장을 보러 마트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늘 가던 곳이었지만 우연히 특별한 일이 벌어질 때 쓰는 마법의 어구를 이 타이밍에서 붙이자면, 나는 ‘그날따라’ 늘 가던 길이 아닌, 조금 돌아가야 하는 골목으로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이사 온 지 6개월 만에 처음 가보는 곳. 골목은 얕은 언덕을 따라 이어졌는데, 드문드문 밭이었고 군데군데 새로 올린 상가주택이 몇 채 있었다.
이런데가 있었구나. 하고 골목 끝에 다다를 즈음 나무로 된 붉은 마호가니색 문이 눈에 들어왔다. 잔디로 앞마당을 낸 하얀 건물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단 하나의 문이었다. 짙은 마호가니색 문에 이끌려 다가가서, 시선의 위치에 난 작은 창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이들의 손길로 그린 엽서만 한 그림이 여러 점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미술학원인가 싶었다. 이제 막 자신의 색을 입히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지만 학원이라는 성격의 단어가 담기에는 너무도 영혼의 향기가 짙은 곳. 카페인가? 공방인가? 시선을 사로잡았던 공간의 힘이 마음까지 사로잡는 데엔 단 몇 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래, 예쁜 곳은 벌써 누가 다 차지했어.‘
슬슬 작업실을 열어야겠다 마음먹고 있었기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런 거였다. 그보다는 후에 따라오는 궁금증이 훨씬 더 컸다. 마호가니색 문이 달린 그 공간. 나보다 조금 빨라서 먼저 그 자리를 차지한, 나 말고도 예쁜 자리를 알아보고 더 생생한 숨을 불어넣은 이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약간의 샘을 느끼며 이미 주인이 있는 그곳을 사진으로 담고 발자국을 뗐다. 아쉬움이 가득한 걸음으로 얼마 가지 못했을 때, 커다란 주목나무 한 그루를 사이에 두고 하얀 건물의 또 다른 입구가 나왔다.
아직 누구의 차지도 아닌 곳. 빈 도화지 같은 공간 위로 순식간에 작업실 모습이 그려져 나는 금세 달뜬 기분이 되었다. 저 쪽이 아닌 게 아쉽지만 이 쪽도 꽤 근사하게 채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잠겨있는 유리문 너머로 빈 공간을 면밀히 사진으로 남겼다. 멀리에서 보고, 가까이에서도 보았다. 건물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기도 했다. 골목 어귀로 내려가 왼쪽에서 걸어오면서 보고 오른쪽에서 걸어가면서도 보았다. 아주 가끔씩만 발현되는 나의 적극적인 성질이 오랜만에 얼굴을 내민 순간이었다.
물론 마트에 가던 길이었으므로 이내 목적지를 잊지 않고 갈 길을 갔다. 마트에서는 사야 할 물건 목록을 까맣게 잊은 채 하얀 건물의 이 쪽 빈자리만 생각하며 카트를 끌고 빙빙 돌았다.
장은 가볍게 보고, 역시나 돌아오는 길에 다시 골목에 들어섰다. 다시 한번 이 쪽 자리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골목에 들어서자 어둡기만 했던 창문 너머로 노란빛이 스며 나왔다. 멋진 공간에 두 개의 그림자가 비쳤다. 밖에서 기웃대는 나를 발견한 두 그림자의 주인들이 문을 열고 나와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이들 미술학원이에요!
들어와서 구경하셔도 돼요.
이해하기 쉬운 짧은 소개였지만, 공간에 들어선 순간 나는 이곳이 그저 일곱 글자로 설명되고 말 보편적인 미술학원이 아님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과연 이 자리를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을 진짜배기였다. 일반적인 미술학원이었다면 나의 이웃으로 조금 망설였을지 모를 일이었지만 이들은 다르다는 것이 느껴졌다. 재미있는 무언가도 함께 꿈 꿔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꽃작업실을 구하려고 자리를 보고 있다고 했다. 자신들도 꽃을 진짜 좋아한다며, 꼭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말에 홀렸는지 그 순간 이 자리에서 꼭 같이 하고 싶었다. 자매인 그들은, 내가 또래 같아 보인다는 이유로 더욱 반겨주었다. 격의 없는 이 자매와 만난 지 10분도 안되어서 나는 이들에게 친근함을 느꼈다. 아마 첫 만남에서부터 우리 사이에 꼭 닮은 어떤 결이 제자리를 찾아가 스르르 포개어졌던 것 같다. 그들은 왜 그 자리가 좋았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그마저도 내가 그 자리를 탐내던 이유와 정확히 같았다. 설레는 기분이 증폭되어 마음속에서 커다란 물결이 넘실댔다. 드디어 무엇을 띄워도 멀리 나아갈 큰 울림이 시작된 것이었다.
나는 그 길로 창문에 붙어있던 전단지를 떼어 아래쪽에 적혀있는 번호를 확인하고 부동산에 전화를 걸었다. 저녁 장을 본 게 무색하게 배가 하나도 고프지 않았다. 뱃속까지 가득하게 온통 그 공간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완벽히 해가 떨어지고 난 후 캄캄한 골목의 느낌을 보기 위해 저녁 식사를 건너뛴 채 한 번 더 그 자리에 갔다.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714 -10번지의 이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