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5년.
우리는 번갈아가며 지치기도 하고, 금세 또 힘을 내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신념을 지키는 이들이 유명해지고 돈까지 버는 일이란 예상보다 더 오랜 기다림과 마인드컨트롤이 필요한 것이었다. 차곡차곡 나만의 색깔과, 단골, 팬이 천천히 쌓여가는 동안, 체력과 건강은 빠르게 닳았다.
여름으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나는 잠시 아팠다. 열이 자꾸 오르락내리락하더니 끝내 걷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응급실에 가게 되었다. 열이 나는 이유를 찾기 위해 몇 가지 검사를 하고 CT를 찍었다. 나의 장기가 가지런히 담긴 사진에서 오른쪽 신장에 고름이 차 있는 것이 보였다. 참다 참다 병원을 늦게 갔더니 이미 고름 덩어리가 꽤 커져 약물만으론 치료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할 수 없이 신장에 튜브를 꽂아 며칠에 걸쳐 고름을 빼내는 처치를 해야 했다. 그렇게라도 고름을 빼 낼 방법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입원하고 다음날 시술을 하기까지 고난했던 것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시술대 위에 엎드려 누워 등 부분을 마취하고 슥슥 닦은 소독약이 흐르던 장면, 꼬챙이 같은 게 살을 뚫고 신장으로 추측되는 어딘가에 꽂힐 때까지 피부를 밀고 들어오던 느낌, 그리고 그 모든 순간 ‘수술’이 아닌 ‘시술’ 임을 강조하며 나를 안심시켰던 담당 교수님에 대한 배신감이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시술을 받는 동안은 너무 아파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원래 통증을 예민하게 느끼는 몸이기도 하지만, 마취를 했는데도 그 정도의 고통을 느껴야 한다니 가혹한 일이었다. 특히나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던 시술의 후기에서는 마취주사가 가장 아팠을 정도로 느낌이 없었다고 했기에, 이 고통은 나에게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격이었다. ‘많이 아프죠..’ 하며 끝날 때까지 내 손을 꼭 잡아주던 간호사를 보며 종종 천사로 빗대어지는 이 성스러운 직업이 얼마나 경험 바탕의 사실적 표현인가 깨달았다.
시술이 끝나고 바퀴 달린 침대에 실려 병실로 옮겨지는 동안에는 ‘등에서 튜브관이 나오는데 어떻게 똑바로 누워서 자지?’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 앞으로 닥칠 두려움을 모르는 이의 사치였다.
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열이 많이 올랐는지 몹시 추웠다. 어느 정도였냐면, 눈구덩이에 갇혀 마감하게 되는 생의 마지막이 이런 걸까 싶을 정도였다. 의지와 상관없이 다리가 구부정하게 말아 올려지고 어깨가 움츠러든 채로,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온몸이 덜덜 떨리고 모든 근육이 쥐어짜지는 느낌이 들었다. 세포 하나하나가 쪼그라들며 격렬히 진동하는 듯한 감각의 자리마다 커다란 공포가 스몄다. 이대로 폐까지 쪼그라들어 영영 숨을 못 쉬게 될 것만 같아서 할 수 있는 한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깊게 내쉬었다. 생존을 위한 무의식의 필사적 몸부림이었다.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경련 중인 몸이 너무 고통스럽고 두려워서 어린 간호사님께 ‘제. 발. 저. 좀. 어. 떠ㅎ. 게. 해. 주. 세. 요’ 했다. 성대의 근육까지도 떨리고 있는 바람에 이어지지 않는 목소리로 간신히 했던 요청이었다. 탁. 탁. 탁. 세게도 부딪히는 윗 어금니와 아랫 어금니가 무서워서라도 다른 말은 더 할 수가 없었다. 어린 간호사님은 열이 많이 나서 그런 거라 추워도 조금만 참으라고 했지만, 격렬한 근육의 떨림으로 난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그 와중에도 몸은 계속 떨리고, 침대도 덩달아 떨리고, 나는 이대로 화르르 타버릴 것 같아서 잠깐만이라도 나에게 이불을 덮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결국 수간호사님이 오셔서 핫팩 두 개와 이불 세 채를 칭칭 둘러주시고 나서야 몸의 떨림은 서서히 진정이 되었다.
혈관을 타고 들어간 약의 기운이 돌자 기절한 듯이 잤다. 등에 튜브관이 꽂혀있어도 그렇게나 깊이 잠들 수 있는 것이었다. 자고 일어나니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근육통이야 시간이 지나면 괜찮겠거니 했지만 다음날부터 식욕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게 문제였다. 병원 밥이 그 정도로 맛이 없기도 했지만, 웬만해선 먹을 걸 가리지 않는 나였다. 끼니가 거듭될수록 점점 먹는 행위가 버거워졌다. 무거운 입술로 불어있는 쌀알의 수를 새어가며 죽 한 술을 겨우 먹었다. 손과 발이 비정상적으로 부어있었다. 간간히 기침도 했다.
누워있으니 수시로 튀어나오는 기침을 더는 참을 수 없을 때 의사 선생님께 증상들을 말씀드렸더니, 그날 오후부터 나는 신장에 고름 찬 환자에서 폐에 물 찬 환자가 되었다. 이뇨제를 처방받은 환자는 소변이 나오게 하는 주사를 맞고 약도 먹었다. 몸은 다행인지 화학물질에 놀랍도록 빠르고 정직하게 반응했다.
처참한 것은 반응 결과를 들이가 표시된 하늘색 플라스틱 통에 소변을 보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빠져나간 수분의 양을 측정하는 데에 다소 원시적이지만 가장 직관적인 방법. 내가 번거로운 것만 빼면 그보다 나은 방법은 없었다.
폐에 있던 물을 소변으로 빼낼 때마다 나를 대신해 하늘색 통을 비우고, 세척해 주시는 분이 계셨다. 병실의 모든 환자를 도와주시는 분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분께 의지하는게 그렇게 불편해서 화장실을 나올 때마다 어쩔 줄을 몰랐다. 게다가 통 세척이 끝나기가 무섭게 몇 번이고 화장실을 드나들다 보니 죄송스럽고 지켜보기 민망하기도 해서 곧 그 작업을 직접 했다. 화장실 한번 다녀오는 것도 체력적으로 부담이 되는 환자였지만, 내 소변의 처리를 누군가에게 계속 맡기는 것은 더 수치스러운 젊은이였으므로 그것만큼은 스스로 하고 말았어야 했던 것이다.
화장실이 딸려있는 1인 병실을 쓸 수 있는 여유가 있었더라면 좋았을걸. 한 칸뿐인 공용 화장실을 전세 내고 앉아있는 것은 여러 가지로 괴로웠지만, 불과 몇 시간 만에 폐에 있던 물이 방광으로 옮겨갔다가 몸 밖으로 나가는걸 즉각적으로 확인하는 건 신기한 경험이었다. 동시에 인체란 얼마나 연약한가 생각했다.
반나절 내내 소변을 왕창 보고 나니 거짓말처럼 기침이 줄었다. 죽도 한 숟갈 겨우 들어가더니 서너 숟갈은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다음 날은 반찬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다음 날은 조금 더 양이 늘어 죽 반그릇은 먹을 수 있었다.
2주면 건강해져서 퇴원할 줄 알았는데 아직도 이게 뭐람. 나는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 슬슬 애가 탔다. 알과 공룡의 결혼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탓이다. 우스갯소리로, 너희 결혼식에 못 갈까 봐 내가 임신을 안 한다고 할 정도로 그들의 결혼식은 나에게도 매우 중요한 이벤트였다. 둘이 결혼을 안 한다 한들 각각의 결혼식에서 1열 하객이었을 내가 알과 공룡이 하나가 되는 결혼식에 참석을 못 한다는 것은 상상을 해 본 적도, 이 우정의 역사에 도무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많이 걸으면 고름이 빨리 빠져나간다는 거북이의 팁으로 수액이 달린 트레이를 끌고 틈만 나면 면회실을 쳇바퀴 돌 듯 돌았다. 밥 먹고 소화시킬 겸 돌고, 주사 바꾸고 돌고, 면회실과 복도를 돌다가 체력이 허락하는 날엔 좀 더 멀리에 있는 옥상 정원도 돌았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퇴원은 공룡알의 결혼식을 넘긴 다음 주에야 이뤄졌다. 병실 침대에서 유튜브로 생중계해주는 결혼식을 보며 둘러진 커튼 속에 앉아 나는 거의 오열했다. 아무리 숨죽여 울었어도 커튼 새로 흘러 나간 울음소리는 남들에게 오해를 사기 충분할 정도였다. 저마다의 이유로 눈물을 흘리는 곳에서 이런 호사스러운 눈물이라니. 잠시 잊었지만, 내가 있는 곳이 병실인걸 생각하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심지어 결혼식장이 아니라 천만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본인의 결혼식을 제외한 모든 결혼식에서 눈물을 흘린 내가 공룡알의 결혼을 눈앞에서 보고도 안 울었을 리는 없고, 특히나 이 정도 눈물이면 뭔가 있어도 대단한 사연이 있는 여자로 오해하기 딱이었을 테니까.
하여간 유명인사도 아니고, 결혼식을 생중계를 해주는 시대라니. 병문안도 금지된 외로운 코로나 시대. 비록 아파서 누워있는 처지에도 그 순간만큼은 몹시 다행인 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