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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둥 Dec 05. 2024

라마와 거북이

 나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을 라마와 거북이에게 전했다.

나와 라마와 거북이는 대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나 친해진 사이로, 우리는 한 때 스스로를 뉴런 공동체라고 여겼을 정도로 절친하다. 당장 먹은 저녁 반찬이나 서로의 생리 주기까지 꿰고 있을 만큼 매일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럼에도 이 일은 너무 심각해서 차마 바로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나와 함께 제주에 간 이들이 바로 라마와 거북이였기에 더 그랬다. 비록 나에게 경계의 말을 건넨 이들이었으나, 그때는 의심 하나 없는 마음이라 할 수 있는 장난 섞인 농담이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사건을 듣자마자의 라마와 거북이는 굉장한 충격을 받은 나머지 극도로 침착하게 사실을 확인하고 내 안위를 물었다. 우리는 모두 중대한 사건 앞에서 생각이 또렷해지고 한 층 더 침착해지는 타입이었다.

 다만, 자신들이 아는 커플 중 가장 이상적인 부부였기에 그의 외도가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건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이제 그의 외도는 지울 수 없는 사실이었다. 13년의 신뢰가 속절없이 무너지는 걸 막을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혼이란 다 무엇인가.


 우리 중 라마는 평소에도 가장 이성적인 친구여서 가끔 그녀가 이성을 잃고 내뱉는 무시무시한 욕은 상당한 위로가 되었다. 라마는 그와, 사랑에 빠진 그 애를 향해 아무리 퍼부어도 넘치지 않을 욕을 한바탕 쏟았다. 그리고는 넋을 놓고 있는 나 대신, 자신의 자원을 총동원하여 상간녀의 신분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섰다. 그와 상간녀는 공공연하게 부적절한 관계였으므로 신분을 숨긴 채 주로 온라인상에서나 은밀하게 사이를 드러냈는데, 라마는 탐정처럼 일부가 가려진 퍼즐 조각을 기가 막히게 맞추는 능력이 있었다.   익명성 뒤에 숨은 그들의 언행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저급하고 불안정하여 퍼즐을 맞출수록 우리는 혼란스러웠다. 상간녀는 둘째 치고, 그는 분명 내가 알던 그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연거푸 허탈했다. 물론 상간녀의 모습도 상당한 충격이었다. 그녀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직업적인 색안경을 벗고 보더라도, 순수한 아이들을 앞에 두고 온라인에서는 입에 올리기도 수치스러운 단어들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다가 수업이 시작되면 모범적인 선생님인 듯 행동할 이중적인 모습에, 배신감과 어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감마저 꿈틀댔다. 유부남과의 불륜을 몸소 실천 중인 초등학교 선생님. 적어도 나라면 그런 교사에게 내 아이를 맡기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대의를 위해서라도 교육청에라도 알려야 하는 것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그런가 하면, 순하디 순한 공감대왕인 거북이는 이 상황에서 내게 필요한 것들을 누구보다 빠르고 명료하게 상기시켜 주었다. 이혼을 하든, 상간소를 하든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변호사의 자문이 필요할 것이라는 말. 그 말을 거북이가 가장 먼저 했다는 점이 놀랍다. 나는 그제야 나에게 변호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변호사라는 직군의 사람은 어디에서 어떻게 알게 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채 살아온 34년. 특히나 철저하게 이과적 사람들에 둘러싸인 삶을 살아온 나는, 변호사란 평생토록 만날 일 없을 거라 생각했다. 거북이는 어떻게 하면 손쉽게 변호사의 상담을 받을 수 있는지도 알려주었다. 연애시절 그와 헤어졌을 때, 해외 봉사활동을 마치고 가장 먼저 달려와 끼니를 챙겨주던 거북이. 그때 거북이가 날 보자마자 했던 말을 우리는 모두 기억한다. “너 얼굴이 카키색이 됐어.” 이번에도 거북이는 가장 먼저 달려왔다. 눈물로 짓는 행복의 전시 오픈을 함께 도우며 “두 번째 보는 카키색 둥둥의 얼굴이네.” 하고 말했다. 슬픈 상황이지만 그 말을 들으니 조금 웃겼다. 거북이는 정신없는 나를 위해, 시간이 돈이니 변호사와 상담할 내용을 미리 정해보자며 질문 리스트도 만들어주고, 떨리는 목소리로 아무 말 못 하는 나 대신 스피커폰을 켜고 전화 상담도 해주었다. 돌아가는 길에는 쓸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필요할 수도 있다며 휴대용 녹음기를 주문해 주었다. 우리는 어느새 자라서 각자가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으로 친구를 위로해주고 있었다. 쉽게 볼 수 없는 라마의 뜨거운 분노와 거북이의 냉철한 가이드는 눈물로 뒤범벅인 매일을 사는 중에도 든든한 버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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