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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둥 Nov 28. 2024

오직 너라서 가능한

코로나라 다른 가족은 면회도 되지 않던 그때. 내 옆의 사람은 다른 가족들의 몫까지 나를 챙기느라 고생했다. 때마다 내가 좋아할 만한 과일을 싸들고 오고, 묵은 속옷을 가져가 세탁하고, 새 속옷을 가져오는 일. 땀과 기름 범벅이 된 머리를 감겨주는 일도 모두 그의 몫이었다. 노부부가 된다면 겪어야 할 모습이 아마 이런 거겠구나 싶었다. 숙경과 영민이 해준다 해도 마냥 마음 편치만은 않을 일을 그가 해주는데 거북함은 없고 그저 많이 고마웠다. 신기한 일이었다. 우리를 둘러싼 성벽이 한 층 더 두터워지는 것 같았다.

나아갈 즈음에는 병실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삶이란, 끝자락에 다가설수록 살아온 생의 모습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나의 생을 잘 채우는 것. 그것이 내가 앞으로 해야 할 단 하나의 책임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아프고 나니 몸과 마음의 체력이 이전 같지 않았다. 축 쳐진 영혼의 그림자를 다시 춤추게 할 무언가가 필요했고, 그것을 찾으러 친구들과 3박 4일로 제주도에 다녀왔다. 제주에서 마주한 자연은 나를 다시 일깨워서, 돌아와서는 무엇이든 해봐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가을이 오는 소식에 맞춰 이웃과 함께 우리가 좋아하는 초록 잔디밭에 작지만 풍요로운 정원을 만들었다. 뜨거운 가을볕 아래에서 맨 손으로 여름내 자란 잡초를 뽑고, 돌을 고르며 힘들게 이루었지만 좋아서 한 일이니 그마저도 기쁨이었다. 정원이 완성되자, 평소에도 ‘카페’로 종종 오해를 받던 우리의 공간이 ‘근사한 정원을 가진 카페’로 오인되는 순간이 더 늘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해 주시는 분들을 보니 마음이 따뜻해지고 넉넉해져, 더 많은 것을 나누고 싶었다. 고민 끝에 우리는 행복하다고 느끼는 일상의 작은 부분, 소중한 순간들을 끄집어내는 프로젝트성 전시를 이어가기로 했다. 행복한 순간의 모습과 단어들을 모아 전시를 만들어가는 순간은 준비 과정도 행복하게 고단하였다.

그날도 행복한 부분을 가득 모으다 퇴근을 한 여느 때와 같은 저녁이었다. 병원의 맛없는 밥 대신, 내 옆에 있는 이와 먹는 수수한 집밥이 행복이라 생각하며 막 설거지를 마쳤다. 물을 많이 마시라는 의사 선생님의 조언을 충실히 하기 위해 물 한잔을 따르던 참. 식탁 위에 올려둔 그의 핸드폰 화면이 잠깐 반짝였다. 그는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였다.

1초도 안 되는 사이.

밝아진 화면에 무심코 시선을 뒀던 그 순간.

쿵.

내려앉는 심장과 함께

지난 13년의 시간이 붕괴했다.

심장이 요동쳤다. 1초 전, 평온한 마음으로 나를 위해 따랐던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물이 식도를 따라 내려가는 순간에도 머릿속은 빠른 속도로 엉망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냉철하고 침착해야 하는 때. 병원에서 단련된 위기를 감지하고 나를 지키려는 본능이 순식간에 각을 돋우며 살아났다.

잘못 본 것일까.

잘못 봤을 리가 없었다. 나의 사고의 구조에 먼지만큼도 없는 경우는 애초에 잘 못 볼 수도, 오해를 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1초의 순간이 자꾸 뇌리에서 팝업 되었다. 분명 아는 얼굴이었고. 다정했다.

내가 제주 여행을 다녀오는 사이 남편은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하기로 했었다. 함께 게임을 하는 친구들이었고, 꽤 오래된 관계였다. 그중엔 내가 늘 연애를 응원하는 그의 오랜 절친도 있었다. 남편은 그 친구와 그 애의 연애를 응원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라고 했다. 내 남편에게 형이라 부르던 그 애. 아주 예전에, 같이 게임을 하는 친목으로 다져진 그 애의 남자친구와도 다 같이 종종 본 적이 있다. 함께 여행도 다녀왔다. 언니언니 하며 나와 남편을 함께 챙기던 그 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느 부분은 그와 그 애가 조금 겹쳐 보이기도 했더랬다.

제주 여행에서 나의 친구들은 성비가 맞는 친목 모임을 아무렇지 않게 허락한 나를 보며 놀라워했다. 너무 순진한 건지 관대한 건지 위기의식을 좀 가지라고 했었는데, 그 순간에도 나는 친구들의 터무니없는 상상이 허무맹랑하여 그저 재미있기만 했더랬다.

그런데 그들이 하던 우려가 현실이었다니. 어쩐지 열심히 요리하고, 맛있는 디저트를 잔뜩 준비하고, 비싼 과일을 사다 놓더라. 요즘 퍽 웃는 일이 잦아진 그였다.

며칠 밤이나 속을 앓았던가. 그의 대답을 들을 각오가 서게 되었을 때 남편에게 둘의 관계를 물었다. 그제야 한동안 입꼬리가 내려올 줄 모르던 그의 표정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건,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아니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만큼 관계가 심각하다는 걸 의미했다.

지옥 같은 나날이 시작되었다.

그와 실랑이하는 매 순간, 나는 온몸에서 혈관을 돌고 있는 모든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도 그 나름대로 밤을 지새우는 고민과 눈물로 얼굴이 퉁퉁 붓고 몰골이 엉망이 되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와이프의 불륜 현장을 목격한 남편이라고 해도 믿을 법했다.

그는 2주만 시간을 주면 정리하겠다고 했지만 결코 그러지 못했다. 2주가 지난 뒤 애절한 눈으로 내게 건넨 말이란, 나를 아직 많이 사랑하므로, 그저 조금만 놀고 올 테니 기다려주면 안 되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의 많은 부분들을 이해하고, 인내했지만, 인내의 결과가 더 큰 인내를 요구하는 뻔뻔함이 될 줄은 몰랐다. 저토록 솔직한 이기심을 어떻게 말로 뱉을 수 있을까. 그에게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가 막혔다.

그러나 이게 말이 되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그였기에 말이 되는 것이 나의 비극이었다.

기어코 네가 나에게 이런 슬픔을 주는구나.

오빠가 나한테 헤어지재.

이웃에게 사실 그대로를 토하듯 고백했다. 행복만을 말하는 우리의 설레는 프로젝트에서 도저히 내 앞에 닥친 비통을 숨길 재간이 없었기 때문에.

웃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 웃의 눈물을 보니 나도 따라 눈물이 났다.

이는 우는 동생 둘을 위해 말없이 뜨끈한 차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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