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골든라이언 Oct 03. 2023

2. 일곱 부처님들의 메시지

나란히 걷는 선불교

앞으로 올릴 글들이 방향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

'기준점'을 두려고 합니다.


우선,

다음 7개의 시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몸은 형상이 없는 데에서 생겨나니,

    환술(幻)이 온갖 형상을

    만들어낸 것과 같네.

    환술로 만들어진 사람에게는 마음이 본래 없으니

    죄와 복은 모두 공(空)하여 머물 곳이 없네.

                               

2. 모든 착한 법 일으키는 것도 본래

    환술이요,

    온갖 악업 짓는 것 또한 환술이네.

    몸은 물거품과 같고 마음은 바람과도 같으니

    환술로 생겨난 것에는 근본도 실상도 없네.

            

3. 사대 (四大, 물, 불, 바람 그리고 흙)를 빌려서

    몸으로 삼았고

    마음은 본래 생겨나지 않았으나

    대상을 따라서 있게 되었네.

    앞에 대상이 없다면 마음 또한 없으니

    죄와 복도 환술과 같아 생겼다가 사라지네.

                         

4. 몸이 실체가 없음을 보는 것이 부처님의 봄이요,

    마음이 허깨비와 같음을 깨닫는 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이네.

    몸과 마음의 본성이 공한 줄 안다면

    이 사람이 부처와 무엇이 다르랴!

                        

5. 부처란 몸을 보지 않아도 부처인 줄 알지만

    만약 진실로 안다면 부처가 따로 없네.

    지혜로운 이는 죄의 성품이 공한 줄 잘 알아서

    걸림이 없이 생사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네.

                            

6. 모든 중생의 성품은 청정하여

    본래부터 생겨나거나 없어질 수 없네.

    이 몸과 마음은 환술으로 생겨난 것이니

    환술로 만들어진 것에는 죄와 복이 없다네.

                               

7. 별을 보고 깨닫게 되었지만

    깨달은 뒤에는 별이 아니네.

    사물을 뒤쫓지 않지만

    무정無情 (돌이나 쇠 같은 것)은 아니네.

                      


이 7개의 시는 모두 간결하지만 강력하고 일관된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1~3번 시에서는,

[몸과 마음 모두 근본도 실상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평소 법, 윤리 그리고 도덕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선과 악] 그리고 그 결과물 혹은 인과율에 의해 되돌아오는 [죄와 복]조차도 결국은 근본이 비어있는 [공空]이며 환술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몸은 물거품 마음은 바람]


'내가 이렇게 존재하고 살아 있는데…. 라며 이렇고 저렇고 따지고 묻고 싶은 많은 질문 일체를 단칼에 베어버리는 이보다 더 적절하고 냉철한 표현이 있을까요.


의식의 단계를 매우 구체적으로 체계화한 유식사상(唯識思想)에서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부르는 제8식이 일생의 기록이 저장되어 있어 다음 생으로 이어져 시절 인연에 따라 적합한 곳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씨앗 혹은 종자]로 표현됩니다. 기록 저장되는 3가지는 생전에 지은 [복, 업 그리고 지혜]이며 이에 따라 다음 생의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합니다. 추후에 좀 더 깊게 들여다보겠습니다.


다음 4~6번의 시에서는,

결국 실타래처럼 얽혀 생긴 이제 8 식이라는 씨앗도 그 근본의 실상은 없는 것이어서 철저하게 깨뜨려 우리의 본래 성품을 되찾기만 하면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과 다를 바 없는 대자유인이 된다고 알려줍니다.


바로 위의 시들은 우리가 [직지심경]으로 더 잘 알고 있는 [직지심체요절 直指心體要節] 상권 첫 번째 장 과거 7불 佛 (부처님) 게송(偈頌, 불교적 교리를 담은 한시 형식의 노래) 편에 기록된 것입니다. 원문해석은 대한불교조계종 동국역경원에서 발행한 '직지 (2005년)'에서 가져왔습니다.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장엄겁莊嚴劫, 비바시毘婆尸 부처님

2.  장엄겁, 시기불尸棄佛 부처님

3.  장엄겁의 마지막 비사부불毘舍浮佛 부처님

4.  현겁賢劫의 첫 번째 구류손불拘留孫佛 부처님

5.  현겁의 두 번째 구나함모니拘那含牟尼 부처님

6.  현겁의 세 번째  가섭迦葉 부처님

7.  현겁의 네 번째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


계속해서 살펴보면

6번째 가섭 부처님의 게송에서,

[모든 중생의 성품은 청정하여 본래부터 생겨나거나 없어질 수 없다] 

는 문구를 통해 앞의 부처님들이 비유한 '환술적 상태'에 왜 속지 말아야 하는지를 설명함과 동시에, 우리들도 진정한 지혜를 갖춘 부처님과 같은 지위에 오를 근본과 자격을 갖추고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결국, 선한 업을 쌓아 복을 누리는 유한한 안락에도 머무르지 말고, '이 모든 것은 허상이니 다 부질없다'는 식의 허무주의에도 빠지지 말고,  진정한 참나 즉 [본래의 청정한 성품]을 되찾아 '생과 사'의 거짓 덫에 걸림 없는 자유를 회복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7번째 석가모니 부처님의 게송은 앞선 부처님들의 게송처럼 교리적 설명이 아닌 스스로 체득하며 느낀 바를 옮긴 듯 한 표현입니다. 마치, 과거 부처님들에게 화답하는 것처럼. 그리고  이다음에 어떤 콘텐츠들이 올지 미리 예고하듯이  깨달음의 경계를 보여주는 선시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과거 칠 불의 게송들을 연결해서 보면 시작과 끝이 맞닿아 있는  일원상(一圓相)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아무튼,

그 길고 긴 시-공간의 흐름 속에서 저 게송들이 정말 이어져 온 것인가에 혹은 임의 작성된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에 대한 것은 잠시 내려두고 이 게송들 구절들을 면밀히 살피다 보면 [직지]라고 하는 중요한 불교의 역사적인 기록서에 어째서 맨 앞부분에 위치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선불교의 핵심이 모두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  이 게송들을

첫 번째 '기준점'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이러저러한 복잡한 교리(敎理)를 이해하기 힘들거나,

주력(呪力) 수행 (만트라 등의 진언을 외는 것)과 기도를 올리는 등의 일련의 의식들이 마치

기복신앙인 듯 느껴져

불교에

거리를 두고 있는 분들이라면,


위 시들에 담겨있는 메시지를

천천히

음미해 보시길 권유드립니다.


그리고..


어땠을까요?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닫고 난 이후

바라본 새벽별은.


함께

상상해보시죠 ^^




매거진의 이전글 7. 양자量子, 색즉시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