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골든라이언 Nov 29. 2023

7. 양자量子, 색즉시공?

나란히 걷는 선불교

[얽힘과 중첩]은 [색즉시공]이다?


요즘, 양자역학(量子力學, Quantum mechanics)의 [파동과 입자 이중성]현상을 흔히 반야심경(般若心經, 혹은 반야바라밀다심경)의 중간 대목에 나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물질적 현상은 실체가 없는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인해 물질적 현상이 있다. 즉 색은 공이요 공이 색이다)'의 이치로 설명하려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마치 뭔가 있는 것도 같도 동시에  없는 듯 한 이 특별한 상황을 색즉시공이라는 불교적 교리에 적용해서 자연의 이치가 그런것이 아니냐 하고 설명하려고 합니다. 물론, '색즉시공..'의 구절은 분야를 막론하고 가장 빈번하게 즐겨 사용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래 총 600여 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반야(般若, 지혜) 경전의 핵심 중심사상을 간추려 제목 포함 한자 270자로 함축한 반야심경(般若心經) 굳이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마하 반야.."로 시작하는 이 반야심경 독송은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반야(般若, 지혜)]는 산스크리트어 프라즈냐(प्रज्ञा prajñā) 또는 팔리어 빤냐(paññā)를 가리키는 낱말 (출처: 위키백과)이며, 모든 사물의 본래의 양상을 이해하고 불법(佛法)의 진실한 모습을 파악하는 지성(知性)의 작용. 또는, 최고의 진리를 인식하는 지혜(정의 출처: Oxford Languages)라고 합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의 첫 구절인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은 [지혜의 빛에 의해서 열반의 완성된 경지에 이르는 마음의 경전,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설명 할 주제 즉 제목인 셈입니다.


비록 짧은 글이긴 하지만, 내용적 측면에서 보살의 수행법, 부처의 눈으로 보는 오온(五蘊, 형성된 다섯 가지 요소)의 실상, 그리고 주력에 의한 성취의 가속화 등 세 부분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그 중 '색즉시공 공즉시색' 파트는 지혜를 갖춘 불보살의 혜안으로 보는 오온의 실상을 설명한 부분의 일부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한자 원문을 번역한 한글 직역 본을 좀 더 자연스럽게 읽기 편하게 한 번 더 임의 해석을 추가해 살펴보겠습니다.


[물질이 공 (비어있는 것)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다. 즉,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인 원리는 느낌, 생각, 의지 작용과 의식까지 모두 적용된다. 따라서, 이 모든 근본 비어 있기 때문에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비어있는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 생각, 의지 작용과 의식조차도 없으며, 이에 상응하는 감각기관인 눈과 귀 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다고 볼 수 있기에, 눈의 경계부터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다.


그러니까 오온 그 자체가 성립 안되므로 이로 말미암은 어리석음(무명 無明, 미혹함)도 없고 또한 어리석음이 다함도 없고, 결국 늙고 죽는 다는 것이 없으니 이를 벗어나는 일 또한 없다. 이렇듯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은 원래 비어있기 때문에, 괴로움이 없어지거나 로움을 없애는 길도 특별히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사실상 괴로움을 벗어나는 지혜라는 것도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딱히 얻을 수 있는 지혜라는 것조차도 없는 것이다]


위 내용을 살펴본 바와 같이, 그저, 빛이라고 하는 것은 오온 가운데 색(色)의 영역에 있는 눈과 보는 경계에 해당되는 한가지 현상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빛 과 어둠의 존재 여부를 다루지 않습니다. 오직 '빛' 혹은 '어둠'을 구분 인식하는 우리 성품의 본질과 실상에만 그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관찰한 그 결과물인 '빛의 입자성 과 파동성'을 반야심경의 요체에 대입하는 것은 성립이 안 되겠죠. 무리해서  이를 대입하는 순간, 오온에 의지해 양자를 관찰하여 발견한 어떠한 이론적인 것은 결국 실상이 없는 비어있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그 결과물인 노벨상조차 부정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합니다. '공'의 바다에 던지는 한 방울의 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중적으로 양자의 특성을 쉽게 전달하기 위해 쓰는 비유적 표현 정도로 쓰는 게 가장 원만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앞으로 암호 같은 난제들을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양자역학 분야도 공부 열심히 해서 미래의 연구 분야에 잘 적용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이 개념적 오해 내지는 오류에 대한 부분은 꼭 한 번 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관찰되는 것이 '양자'이건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가진 오온의 산물이고 우리인간에게만 의미있는 것입니다.


사실, 오온으로 겪는 일체 고액을 넘지도 않은 중생의 눈으로 아직 체득하지도 않은 색즉시공을 논하는 것 부터가 무리이고. 이건 모든 일반인에게도 적용될 주의사항 일 것입니다. 조심해야겠죠?


좀 더 현상학적인 관점으로 들여다 보겠습니다.


과학영역에서, 생물학적으로 사람이 본다는 것은 '빛' 혹은 어떤 '상'이 각막과 수정체를 통해 안구로 들어오면 망막에 상이 맺는데, 이 외부의 상은 상하좌우가 바뀌어서 망막에 도달하고, 망막은 시신경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뇌로 전달하기 위해 전기적 신호로 형태를 바꾸는 역할을 합니다. 특히, 렌즈를 거쳐 들어온 빛은 망막의 로돕신이라는 단백질을 자극해서 빛의 신호를 전기적으로 변환해서 시세포에게 전달하면 뉴런 간의 신경 전달 물질들의 활성 통해 뇌에 [시각] 형태의 정보를 전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꿈을 꿉니다. 재밌는 것은 한밤중 빛이 들어오지 않는 가운데 낮의 꿈을 꿀 수도 있고 환한 대낮에 캄캄한 밤의 꿈을 꾸기도 합니다. 이때에는,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물리적인 빛과 렌즈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현상을 뇌의 기억, 무의식 혹은 잠재의식이라 부르건 그렇지 않건 우리는 분명히 꿈속에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다는 것의 본래 능력은 바깥 경계인 빛과 오근 중 하나인 눈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억 속에 어떤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 역시 그 시공간을 들여다보는 물리적인 수정체와 빛에 의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랜 훈련을 하면 눈에 의지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글을 읽는다든지, 색깔을 맞힐 수도 있는데 이를 두고  종종 제3의 눈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혹은,  초능력으로 다른 곳을 보거나, 유체 이탈을 통해 신체 밖으로 나와서 본다거나, 다른 영혼을 본다거나 하는 특별한 현상들이 종종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벤트가 가능한 것은 원래 보는 성품은 물리적 경계나 감각기관에 근원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영혼이 있어, 혹은 불보살이 있어서 우리를 볼 수 있다면, 그건 빛과 렌즈의 작용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오온 가운데 흐르는 에너지 형태일 것입니다. 게다가 만약 신체와 뇌가 보는 것의 근본이라면, 모든 사후세계의 일은 아무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그곳이 어디건 볼 수가 없을 테니까요.


신체는 사람이 타는 자동차와 마찬가지입니다. 캄캄한 밤중에 헤드라이트가 꺼지거나 앞 유리가 망가지면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수리해야 합니다. 하지만 운전자가 못 보는 것이 아닙니다. 보는 성품은 그대로 보존한 체 차에 내려 걷거나 다른 차를 옮겨타거나 하면 됩니다.


그래서, 능엄경에서는 앞을 못 보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것을 본다'로 해야 한다고 알려줍니다. 실제 장님이라 하더라도 보는 성품은 온전하게 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렌즈와 빛에 의존하지 않고 보는 모든 다른 생명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께서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갖추고 있다고 한 것에는 이런 기본적인 성품이 동등하게 잠재하고 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논할 수 있다 하더라도 결국 오온의 체득을 통한 이치를 확연히 깨닫기 전에는 꿈속의 이야기에 불과 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반야심경에서 진실로 이를 체득하기 위한 수행법에 대한 설명 다음 두 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의 첫 시작인 다음 구절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지혜의 완성)를 행할 때, 오온이 공(비어 있음)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넌다.]


그리고, 후반부의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아주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을 통해 오온은 본래공한 것이니 수행을 통해 겪을 온갖 고난에 마음을 두지 말고 두려움 없이 전진해서 헛된 생각을 완전히 떠나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라는 내용입니다. 이때, 반야바라밀다 주문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을 지니고 수행에 돌입하면 온갖 마장을 무사히 건너 갈 것이다 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능엄경에서는 보다 상세히 수행 과정 중 오온이 각각 일으킬 수 있는 열 가지의 전도몽상((顚倒夢想, 앞과 뒤가 뒤바뀐 꿈같은 생각), 즉 총 오십변마장(五十辯魔障, 50가지 장애들)을 열거하여 매우 구체적인 방해 현상들을 설명합니다. 핵심 골자는, 내가 수행중 어떤 특별한 경계에 다다르거나 능력을 취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스스로 도를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계속 나아가야된다는 것 입니다. 여기에는 말그대로 여섯가지 신통력과 불보살 친견 등등 오온이 일으킬 수 있는 모든 장애를 뜻 하는데, 결국 이것들의 본질은 비어있는 것이어서 기뻐하거나 두려워 말고 계속 뚫고 지나가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분이 있어 관세음보살을 떠올리며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린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분은 개인적인 고난의 문제해결이나 극락왕생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고 오로지 도를 이루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밤낮없이 관세음보살 명호를 부르며 드디어 극도의 몰입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어느 순간 나도 없고 내 몸도 없는 듯하며 내가 소리를 내는지 우주가 소리를 내는지 분간이 안 되는 와중에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합니다. 이 세상의 언어가 아닌 말씀으로 수기도 받고 모든 세상의 소리도 들리는 듯하며 기운이 넘쳐흘러 드디어 세상과 물아일체가 된 것 같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참 이치에 도달 한 것 같은 마음이 듭니다. 하늘 세계 사람들도 귀신들도 다 보이며 법문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우주의 시작과 끝도 보이는 듯합니다. 드디어, 이제 모든 자연의 이치를 깨쳤다고 확신합니다]


정말 이분은 요사장부(了事丈夫, 일을 마친 사람)의 도에 이른 것일까요? 주력이든, 염불이건 무의식중에 어떠한 불보살에 대한 마음 즉 나만의 어떤 형상들이 잠재해 있다가 그 몰입도 가 높아지면 어떤 행태로든 솟아올라 발현됩니다. 현실과 아닌 것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선명하게.. 결론적으로는 자신을 이루고 있는 오온이 만든 허상에 스스로 속게 되는 상황이 지속적해서 발생합니다. 어떤 상이 있으면 이럴 저럴 것이다 하고 나름의 판단을 하는 생각들이 계속 붙어 들어오기 때문에 이를 멈추지 않으면 끊임없이 그 결과물들이 발현되어 나타납니다. 이것이, 주력과 염불 등 일반적인 수행법만으로는 궁극에 도달하기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선종이 왜 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 와 교외별전(敎外別傳, 언어문자외에 마음으로 전한다)을 강조하는지 이해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저, 문자와 언어를 배척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세계에서, 문자와 언어가 아니고는 진리를 전달 할 방법이 없죠. 다만, 약속된 문자와 언어는 '그 답을 알았다'는 착각을 쉽게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수행의 측면에서 해석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애초부터 이런저런 자신만의 답을 내릴 수 없게 만들어.... 결국은 끝끝내 도를 이루어야 그 답을 알 수 있는 '화두'가 탄생한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만든 장애에 걸리지 않도록 말이죠.  물론, '화두의 10종병 (十種病)'도 존재합니다만, 근본적으로 뭔가 '알았다'하는 순간이 스스로 속는 것이라는 지표는 동일합니다. 


저절로 모든것을 알게되는 순간까지, 앞으로만 가는 겁니다.

'오직 모를뿐'을 견지하며 끝까지 갈 수 있도록.


그리고 확신이 들때,

 스승을 찾아 분명하게 점검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본분사를 잃지 않도록 세운

분명한 선가의 철칙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18. 경이로움 그 이상, 무위 열반상 II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