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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영호 Apr 03. 2024

여우와의 사투

2024년 4월 3일 수요일

영국의 일반적인 주거 형태는 가든이 딸린 주택이다. 도로 쪽으로 집이 있고 집 쪽으로 가든이 있는 그런 구조이다. 나 또한 같은 형태의 집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이삿짐이 도착해서 조금씩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잠시 숨을 돌리며 가든 쪽내려다보니 여우 다섯 마리가 한쪽 구석에 모여있는 것이 보인다. 영국에 여우가 많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저렇게 무리 지어 다니는 줄은 몰랐다.


여우는 사람을 보면 피한다고 들었지만 혹시 아이들에게 위험하지 않은지 검색을 . 뜻밖에도 여우가 어린아이를 물어 사망한 사건이 눈에 들어온다.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당시 아이들이 어렸고 막내는 돌이 막 지난 상황이었기에 가족들이 영국에 오기 전에 조치를 취해야 했다. 일단 여우들이 지속적으로 출몰하는지 관찰했고, 며칠 여우들이 이 집을 자신들의 서식지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여우들은 보통 가든에 들어오더라도 그냥 지나쳐 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여우 무리는 그 행태가 달랐다. 부동산 중개인에게 물어보니 이 집이 6개월 정도 비어있었기에 여우들이 자리를 잡은 것 같다고 말한다.


한 마리도 아니고 다섯 마리를 어떻게 쫓아내야 할지 막막하고 두려웠지만,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여우들과의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1차전 – 눈싸움

토요일 늦은 오후,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여우들이 등장한다. 여우들은 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울타리 주변에 자리를 잡았고, 나는 가든으로 나가 최대한 먼 거리를 유지하며 대치한다. 가능성은 낮지만 여우들의 급습에 대비하여 언제든 집으로 재빨리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둔다.


여우들의 눈을 한 마리씩 뚫어지게 쳐다보며 약 10분간 대치상태를 유지한다. 여우들이 나를 경계하고 있었지만 거리를 좁히지는 않았다. 용기를 내어 한 발짝 전진했고 다시 여우들을 쨰려본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고 두 발짝을 속도감 있게 전진해 본다.


그런데 그쪽의 우두머리, 아니 가장으로 보이는 여우가 나를 향해 전진한다. 여우는 사람을 피한다고 했는데 예외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나는 겁에 질려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참담한 패배였다.




2차전 – 돌 던지기

다음날 가든에 돌무더기를 준비하고 여우를 기다린다. 역시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여우 가족들이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 하나씩 들어온다. 움직임이 빠르고 민첩하다. 거리를 충분히 유지하지 않으면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든다.


우선 1차전과 마찬가지로 눈싸움을 하며 돌을 던질 타이밍을 잡는다. 몇 분이 지나고 떨리는 손으로 돌 하나를 살짝 던져본다. 경고 차원이었기에 여우를 직접 겨냥하지 않고 주변으로 던진다. 여우들이 움찔하지만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생각보다 담이 큰 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여우들의 기를 꺾어야 했기에 용기를 내어 여우 주변으로 돌 하나를 세게 던져본다. 그런데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여우들의 우두머리가 나를 향해 다가온다. 나는 다시 집으로 후퇴했다.


절망스러운 패배였다. 그날은 여우들이 무서워 아예 가든에 나가지도 못했다.




3차전 – 영역 표시

다음날 출근하여 동료들에게 여우와 진행되고 있는 전투에 대한 얘기를 했더니, 남자의 소변을 가든에 뿌리면 여우들을 퇴치할 수 있다는 정보를 주었다. 동물들이 그러하듯 남자 사람의 소변으로 영역표시를 하라는 얘기다.


귀가 후 의도적으로 꾹 참았던 소변을 플라스틱 병에 정성껏 담기 시작했다. 저녁에는 여우들이 가든에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작업을 하지 못하고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다.


출근하기 전, 가든에 여우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밤 동안 모아둔 여우 퇴치제를 가든 곳곳에 뿌리고 집을 나섰다.


과연 효과가 있을지 반신반의하며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가든을 확인하니 어둠 속에서 여우의 눈빛으로 보이는 수많은 광채들이 또렷하게 보인다. 실망이 컸지만 한 번의 작업으로 효과가 없으리라 생각하고, 며칠 동안 동일한 작업을 지속한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나의 기운이 약한 것인지 아니면 그 정보가 낭설이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4차전 – 돌과 몽둥이

세 차례의 패배를 맛본 뒤 정면승부를 결정한다. 우선 방어와 공격이 가능한 무기를 찾기 위해 창고에 들어간다. 구석구석 확인하던 중 낙엽을 모으는 긴 막대 갈퀴를 발견한다.


토요일 오후, 갈퀴를 벽에 세워놓고 바로 옆 바닥에 돌무더기를 준비한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여우들을 기다린다. 날이 어둑해지자 여우 가족들이 울타리를 넘어 들어온다.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깊은숨을 쉬며 여우들이 위치를 잡을 때까지 기다린다. 이윽고 결전의 시간이 다가왔다. 울타리를 겨냥하여 돌 하나를 세게 던진다. 돌이 울타리에 맞으며 둔탁하고 큰 소리가 여우들 주위로 퍼지자 우두머리 여우가 다가오기 시작한다. 나는 갈퀴를 사용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집으로 뛰어 들어간다.


여우 앞에서 세 번이나 등을 보인 나의 모습은 너무 참담했다.




5차전 – 여우의 반격

다음 날 아침 가든을 바라보고 있는데 뭔가 섬뜩한 물체가 보인다. 나가서 확인해 보니 커다란 뼈가 놓여 있었다. 처음에는 사람의 뼈처럼 보여 놀랐지만 곧 동물의 뼈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택가에서 어떻게 이런 뼈를 구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이후에도 여우들은 며칠 동안 동물의 뼈는 물론 작은 동물의 시체들을 가든에 지속적으로 가져다 놓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고, 여우를 퇴치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인터넷을 열심히 뒤지기 시작했다.




6차전 – 과학장비 전

여우 퇴치와 관련해 인터넷에서 각종 내용들을 확인하던 중 ‘ULTRASONIC REPELLER’라는 장비가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움직임이 포착되면 고주파가 발사되는 장비인데 여우가 그 소리를 싫어한다고 한다. 나는 즉시 두 개를 주문했고 며칠 뒤 장비가 도착했다. 사각지대가 발생하지 않도록 장비를 꼼꼼히 설치하고 적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드디어 여우들이 나타났고 장비에서 붉은빛이 점멸하기 시작한다. 여우들의 움직임에 장비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우들이 반응을 보인다. 하나둘씩 울타리를 넘어 떠난다.


이후에도 여우들은 계속 찾아왔지만 오래 머물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침입 빈도가 점점 줄기 시작했고 결국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막상 여우들이 사라지고 나니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여우 가족의 가장은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 어렵게 확보한 보금자리를 지켜야 했을 뿐이었다. 상생의 방법이 있었다면 그것이 최선이었겠지만 나 또한 가장으로서 아이들을 지켜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부디 그 이후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잘 살아갔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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