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1월 24일 금요일
자식이 그릇된 행동을 보이면, 부모는 충고하거나 말없이 인내한다. 자식이 훌륭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 어떤 경우라도 버릴 수 없다. 이 것이 사랑이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마도 부모가 자식에게 가지는 그런 사랑의 마음을 타인에게도 가지라는 의미로 이해가 된다.
그러나 가족이 아닌 타인을 어떻게 가족을 대하는 마음과 같이 사랑할 수 있을까?
자식은 아무리 속을 썩여도 끊임없이 용서하고 인내하며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타인에게 있어서는 작은 일에도 엄격한 기준으로 비난하고 정죄하게 된다.
왜 그런 것일까? 어찌하여 이성과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이 세상을 대하는 것인가?
결국 이 모든 현상은 인간의 자기 중심성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부모는 자식을 자신과 하나라고 느끼고, 타인은 나와 구별되는 존재로 인식하기에 발생하는 현상들인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인간이 전적으로 자연의 법칙에 따른다고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과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기에 그런 자연법칙을 거스를 수 있는 존재이다.
만약 이러한 자연적 속성으로 인해 인간의 타인에 대한 사랑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면, 예수님은 인간에게 그런 사랑을 요구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 자기 중심성을 벗어던지고 진심으로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바울의 사랑에 대한 생각에서 그 답을 찾아본다.
바울이 사랑을 정의하며 믿음과 수많은 덕목을 열거한 것을 보면, 사랑이란 어느 한순간에 자연스럽게 차오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일생에 걸친 개인의 의지와 노력이 요구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음에서 진심 어린 사랑이 우러나지 않는다면 어찌해야 하는 것인가?
그 진심에 대해 고민하던 중, 일상에 늘 흐르고 있는 사람의 기분이나 감정이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가리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는 말씀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DNA가 심어져 있으며, 그 DNA의 핵심은 사랑’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 하나님의 DNA가 있기에 사랑에 필요한 이해, 배려, 용서, 인내, 겸손, 온유, 소망 등 그 모든 것들이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이라 믿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으로 내면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 하나님의 DNA에 집중해 보는 것 자체가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 도움이 된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믿음과 선택이다. 그러나 그 선택과 실천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실족하는 경우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실족해도 된다. 중요한 것은 꾸준함이다. 실패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그 길을 가는 것이다. 그렇게 가다 보면 가는 길이 점차 평탄해질 것이라 믿는다.
[마태복음 22:37-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