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호 다섯번째 주제 : free(자유주제)
짝- 경쾌한 소리가 적막 가득한 밤거리에 울려 펴졌다. 여자는 습관대로 몸을 움츠릴 수 있을 만큼 움츠렸다. 지속적인 통증에도 감각이 없는 사람처럼 여자는 그저 바닥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아 가만히 있는 게 상황을 빨리 끝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미안해. 괜찮아? 내가 정말 미안해."
울먹거리며 사과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이제 곧 끝나겠네.’라는 생각을 하며 여자는 몸을 일으켜 대답했다.
"아니야. 나야말로 헤어지자고 해서 미안해."
"그러니까 왜 헤어지자고 했어?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많이 아팠지? 미안해,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사랑이라니, 이토록 잔인한 사랑이 있을 수 있냐며 비웃음이 흘러나왔지만, 여자의 입 밖으로 내뱉어진 단어는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응, 알지. 나도 사랑해."
사랑스러운 단어와는 다르게 그 말투와 표정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남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여자의 얼굴 자체를 쳐다보지 않았다. 혼자서 화내고 울고를 반복하며 언제나처럼 본인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발버둥 칠 뿐이었다. 남자의 발악을 조용히 지켜보던 여자는 깊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여자의 눈에 들어온 건 건너편 건물 맨 위층에 보이는 사람의 실루엣이었다. 여자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실루엣은 곧 종적을 감췄고, 여자는 한참을 실루엣이 존재했던 자리에 시선을 머물렀다.
'여기 건물이 뭐였지. 아, 유치원이었지. 다 봤을까? 그래, 이 야밤에 그렇게 소리 지르며 싸웠는데 안 쳐다볼 리가 없지. 경찰에 신고했을까? 코너만 돌면 경찰서인데 신고했으면 진작 오고도 남았겠지. 지금이라도 신고하지 않았을까? 경찰이 오면 지긋지긋한 이 상황을 끝낼 수 있을까.'
답이 나오지 않는 가정을 세우고 세우며 생각의 나래에 빠져든 여자는 자신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에 다시 현실로 끄집어져야 했다. 진심인지도 알 수 없는 사과의 말에 연신 괜찮다고 남자를 달랬고, 겨우 자신의 행동의 정당화를 끝낸 남자는 홀가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정당화는 언제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언제나 여자가 남자의 말을 무시해서고, 여자가 남자에게 끝을 고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 집에 가자."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여자는 하루의 끝을 먼저 알렸다. 남자가 동의하자마자 여자는 곧장 뒤돌아 원룸 건물로 들어섰다. 계단을 오르며 싸움의 시작을 되돌아보던 여자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폭력의 시작은 남자의 욕정을 풀고 싶다는 제안에 여자가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고작 섹스 때문이었다.
끼이익- 자취방의 문이 닫힐 때까지 경찰은 나타나지 않았다. 건너편 유치원 건물 맨 위층은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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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최초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쓸쓸한 겨울 기운이 물씬 풍기던 거리 곳곳에서 조금씩 초록빛이 감돌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여자와 남자는 같은 대학교의 학생이었다. 누구나 풋풋할 연애 초기부터 둘은 틈만 나면 다툼이 일어났다. 다툼의 이유는 웃어넘길 수 있을 만한 사소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교수님이 부탁하신 일을 처리하고 있어 고작 이십 분 남짓 연락이 안 되었을 뿐이고, 저녁을 먹으러 방문한 고깃집에서 반찬으로 나온 마늘을 모두 불판 위에 올렸다는 그런 별거 아닌 이유일 뿐이었다. 남자는 무엇이든 자신이 무시당한 기분을 느꼈고, 여자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틈만 나면 불만이 오갔고 언성이 높아졌다. 사건의 그 날도 별거 아닌 이유로 서로에게 모난 말이 오가고 있었다.
“됐어, 이 이상 무슨 말을 더해. 다음에 얘기하자.”
기다려보라는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여자는 뒤돌아 걸어갔고, 그와 동시에 등에서 낯선 통증이 느껴졌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주먹과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는 남자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 미안... 나도 모르게... 그러니까 왜 그냥 갔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본인의 행동이 믿기지 않는 듯 남자의 눈동자는 불안한 듯 떨리고 있었다. 지속적인 남자의 사과에 여자는 괜찮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래, 미안하다는데. 너무 화나서 욱한 거겠지. 별로 세게 때리지도 않았잖아.’
처음 겪어보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여자의 뇌는 쉴 새 없이 굴러갔다. 무엇인지 모를 찝찝함이 몸속을 맴돌았지만, 별거 아닐 거라는 합리화를 하며 등에서 느껴지는 욱신거림을 애써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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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폭력은 싸움의 끝에 여자가 결국 헤어지자는 말을 꺼낸 순간이었다. 삐- 여자는 자신의 귀에서 들리는 이명 소리에 상황을 바로 인식하지 못했다. 뺨은 불에 댄 듯 화끈거렸고 두통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맞지 않던 초점이 서서히 맞춰지고 귀에서 들리던 이명 소리가 잠잠해질 때쯤, 여자에게 전달 된 소리는 울먹거리며 사과하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미안해. 내가 이러려던 게 아닌데 너무 화가 나서... 다신 안 그럴게. 한 번만 용서해줘 응? 정말 미안해."
"알겠으니까 그만해."
여자는 당장이라도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점점 더 심해지는 두통 때문에, 그저 이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최선의 방법이 남자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밖에 없는 것처럼, 여자는 수없이 혼자 되뇌었다.
'그래,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라잖아. 그래, 다시는 이러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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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최적화된 장소는 남자의 자취방이었다. 여자는 남자의 손에 이끌려 자취방 안을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이 원룸은 왜 이렇게 작아서야 조금만 움직여도 이곳저곳 부딪힐까 하는 불만이 올라왔다. 이어진 남자의 발길질에 여자는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여전히 이런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인터넷 속에서만 보던 믿기 어려웠던 상황이 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인 것인지, 현실을 끝없이 부정할 뿐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든 도움을 청해야 하는 일이 맞음에도, 남자의 폭력이 날아오는 순간 이성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다. 도망가고 싶은 본능이 꿈틀댔음에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공포로 금세 잠식되어버렸다. 혹여라도 이런 모습을 누구한테 들킬까 싶어, 둘밖에 없는 원룸이건만 여자는 최대한 몸을 숨길 수 있을 만큼 웅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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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턱 막혔다. 여자는 부족한 산소를 들이마시고 싶어 발악했지만, 목을 옥죄어오는 힘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원망스러웠다. 남자가 원망스러웠고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이런 상황 속에 놓여서도 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부족한 산소를 어떻게든 공급하려 발악하는 자신의 모습이 제일 원망스러웠다. 시야가 점점 흐릿해지던 순간, 원룸 안에 흩어져있는 모든 산소가 여자의 몸속으로 매섭게 빨려 들어오는 것 같았다. 정신이 아득했다. 여전히 흥분해 있는 남자에게 여자는 쉽사리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며 말했다.
"미안해, 내가 헤어지자고 해서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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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목이 왜 그래?"
하나둘 반팔을 꺼내입을 날씨에 목티까지 입고 나왔건만, 여자의 목에 난 상처를 발견한 친구가 물었다. '도와줘'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라왔음에도 여자는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다.
너는 뭐라고 대답할까. 내가 미련하다고 생각할까. 지금까지 왜 숨기고 있었냐며 한심하다는 듯 나를 쳐다볼까. 당장이라도 같이 경찰에 가서 신고해줄까. 끝까지 나를 도와줄 수 있을까. 아니면, 너도 내 잘못이라며 나를 탓할까.
"아... 그냥 어디 살짝 부딪혀서... 별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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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남자의 폭력은 계속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대담해질 뿐이었다. 여자가 끝을 고하면 남자는 제일 먼저 손이 올라갔고, 여자가 말을 정정하고 나서야 상황은 끝이 났다. 어느덧 짧은 폭력으로 남자의 흥분이 가라앉으면 여자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했다. 여자에게 더 이상 도움을 청한다는 전제는 없었다. 남자의 폭력은 일상이 되었고, 여자는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 애쓸 뿐이었다. 몇 달 후면 취업으로 인해 서울로 올라간다는 사실만이 여자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비록 한 달 후면 남자 또한 서울로 올라오지만, 직장인이라는 특성상 일주일에 한 번 만나기도 힘들 상황이라는 걸 알기에 그나마 안심이 들었다. 서울에서 가끔 만나던 데이트에서도 여자와 남자는 매번 다툼이 일어났다. 언제나처럼 싸움의 이유는 사소한 것이었다. 여자는 최대한 말을 아꼈고, 어쩌다 한번 남자에게 끝을 내뱉고는 했다. 당연하게 이후에는 남자의 손이 여자에게 향할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었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이 상황을 오늘은 끝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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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자."
쌀쌀한 바람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아직은 겨울의 기운이 거리 곳곳 머물러있던 때, 발 디딜 틈 없이 수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거리의 한복판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말했다. 그 순간 여자는 형용할 수 없는 환희가 솟구쳐 올라왔다. 아무리 숨차게 달려도 보이지 않았던 끝이 예상치 못하게 눈앞에 나타나 버린 것이다. 아아, 드디어.
"네가 끝내자고 한 거야. 그러니까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그 말을 끝으로 여자는 뒤돌아 사람들 틈에 섞어 들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짜증이 났던 인파였는데 지금은 이토록 고마울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남자가 붙잡지 않을까, 혹시라도 끝이 달아나버릴까, 여자는 불안감을 안고 사람들 속에 최대한 몸을 숨겨 남자에게 벗어났다.
홀로 택시를 탔음에도 여자는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혹시 꿈을 꾸는 것은 아닌가, 내가 드디어 미쳐서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 것은 아닌가.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야 여자는 인정할 수 있었다. 정말 끝이었다. 정말로 끝이 났다. 그래, 고작 1년이었다. 남자에게 벗어나는데 고작 1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제 아무도 1년간의 자신을 알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에 여자는 안도의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몸의 떨림이 멈췄다. 드디어 끝이 났다는 형용할 수 없는 희열은 그 세기만큼 금방 가라앉아버렸다. 빠르게 바뀌는 택시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애써 억누르며, 여자는 눈을 감았다.
from.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