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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느 저자 Oct 11. 2021

[여름호] 셋째주, 만춘 : 현수의 이야기

여름호 세번째 주제 : free(자유주제)

 아홉 살 현수는 아빠와 함께 마트에 가는 걸 좋아했다. 엄마는 이가 썩는다며 현수가 제일 좋아하는 초코송이를 사주지 않았지만, 아빠는 늘 세 통에 한 묶음으로 팔고 있는 초코송이를 카트에 담으며 윙크를 날리고는 했다. 그러면 현수는 우웩 토하는 시늉을 하고 나서 깔깔 웃었다.


 또래보다 유달리 말수가 적었던 현수에게 아빠는 든든한 지원군이자 가장 친한 친구였다. 현수가 잠자리에 누우면 아빠는 언제나 현수에게 웃기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재미가 없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현수는 아빠가 좋았다.


 어느 날,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현수가 말했다.


 "아빠, 나 놀이공원 가고 싶어."

 "놀이공원? 현수 또 회전목마만 타는 거 아니야?"

 "그때는 일곱 살이었잖아. 나 이제 아홉 살이야. 이번에는 꼭 청룡열차 탈 거야."

 "아빠는 무서우니까 현수가 아빠 손 꼭 잡아준다고 약속하면 같이 탈게."

 "휴, 알겠어. 대신 여름 방학 끝나기 전에 꼭 가야 해."


 아빠는 간신히 현수의 여름 방학이 끝나기 바로 전 주에 맞춰 휴가 신청을 해두었다. 아직 한 달이나 남았지만 현수는 놀이공원에 갈 생각에 잔뜩 신이 났다. 방문에 붙여둔 방학 계획표에는 분명 '공부하기'라고 적혀있는 시간이었지만 현수는 놀이터에 있었다. 아빠와 청룡열차를 타기 위해 미끄럼틀로 맹연습을 했다.


 땀범벅이 된 현수는 긴 머리카락들을 얼굴에 덕지덕지 붙인 채로 돌아왔다. 꼬마 산적 같은 현수를 본 엄마의 입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침에 머리 말려주는 시간도 줄일 겸 엄마는 가위를 꺼내들었다. 엄마가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현수의 긴 머리카락을 싹둑싹둑 잘라내는 동안 현수는 입을 벌리고 포켓몬스터를 보며 얌전히 앉아있었다.


 엄마는 너무 짧게 잘랐나 생각하며 현수를 욕실로 데려갔다. 현수는 거울 앞에 서있는 웬 남자애를 보고 흠칫했다. 반에서 제일 싫어하는 태훈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어지간해서는 울지 않는 현수가 울음을 터뜨렸다. 때마침 집으로 돌아온 아빠는 냉큼 욕실로 달려왔다. 그리고 짧은 머리를 한 현수를 번쩍 안아올렸다. 아빠는 우리 왕자님, 왜 울어요 하며 달랬지만 현수의 울음소리는 더 커졌다.


 "아빠는 짧은 머리 현수가 훨씬 좋은데?"

 "거짓말!"

 "정말이라니깐? 아빠가 현수한테 거짓말 한 적 있어?"

 "진짜로 짧은 게 더 좋아?"

 "최고로 좋아!"


 현수는 울음을 그쳤다. 아빠는 웃으며 현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엄마는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찬장에서 초코송이를 꺼내왔다. 현수는 코를 훔치며 초코송이 박스를 뜯었다.


 아빠가 현수와 엄마의 곁을 떠난 건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아빠는 퇴근길에 손수레를 끌고 가는 한 할머니를 돕던 참이었다. 음주 상태로 과속을 하던 차는 둘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치어버렸다. 현수는 아빠와 함께 마트에 가려고 짧은 머리를 빗으며 현관에 앉아있었다. 전화로 아빠의 소식을 전해 들은 엄마는 울면서 현수를 껴안았다. 현수는 엄마가 우는 모습을 처음 봤다. 떨리는 목소리로 아빠가 하늘나라로 갔다고 하는 엄마의 말을 들은 현수는 갑자기 아빠가 어떻게 생겼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현수는 청룡열차를 타면 아빠 손을 꼭 잡아주기로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슬퍼만 하다가 현수의 아홉 번째 여름은 지나가버렸다. 아빠와 함께한 여름을 세어보는 데는 아홉 손가락이면 충분했다. 그것은 현수가 중학생이 되어서도,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변함이 없는 것은 아빠가 좋아한다던 현수의 짧은 머리도 마찬가지였다.


 말수가 적었던 현수는 더욱 무뚝뚝해졌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친구가 없지는 않았지만 다들 현수의 그늘을 피해 조금씩 멀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인사도 한 번 안 해본 애가 우산을 빌려줬다. 지현이었다. 지현은 참 말이 많았다. 현수가 딱히 대꾸하지 않아도 열심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며 웃어댔다. 현수도 가끔은 웃어주었다.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현은 문득 현수에게 왜 항상 짧은 머리인 거냐고 물었다.


 "뭐, 나는 현수가 짧은 머리인 게 좋긴 해."


 현수는 아빠 얼굴이 기억났다. 지현과 비슷한 사람. 늘 자신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던 사람. 그런 아빠가 좋아한다던 짧은 머리를 여태 하고 다녔으면서 이제서야 아빠 얼굴이 기억났다. 현수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동안 슬픔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멍하니 멈춰 서있던 현수가 지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 번 길러볼까?"



from.만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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