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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느 저자 Sep 29. 2021

[여름호] 첫째주, 만춘 : 지현과 현수

여름호 첫번째 주제 : 파도

 여름 장마가 끝난 오늘은 마침 일요일이었다. 


 현수는 얼마 만에 비가 그친 거냐며 아침부터 달리기를 하러 갔다가, 땀범벅인 채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는 소파에 누워 잠이 들었다. 에어컨 바람에 혹여 감기라도 들까 지현은 얇은 이불로 현수를 덮어주었다. 무슨 좋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지, 자다가 싱긋 웃는 현수였다. 


 지현은 모처럼 서점에라도 다녀올까 하다가 집에서 영화나 보기로 했다. 외국 영화는 자막 때문에 보기가 불편하다는 현수 때문에 둘이서는 늘 한국 영화를 봤었다. 그래서 지현은 현수가 잠든 틈에 평소 보고 싶었던 외국 로맨스 영화 한 편을 골랐다. 홀로 여행을 떠난 여자가 기차에서 만난 낯선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참으로 영화 같은 영화였다. 


 단잠에서 깬 현수가 부엌으로 가 냄비에 물을 받았다. 가스레인지에 불을 올리고는 찬장에서 짜장 라면 두 봉지를 꺼냈다. 영화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지현이 부엌으로 왔다. 


 "먹을 거지?" 현수가 물었다.

 "너무 좋지. 치즈도 넣자." 하며 지현은 냉장고에서 슬라이스 치즈 두 장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다른 요리에는 젬병인 현수가 짜장 라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끓였다. 배불리 먹은 둘은 거실 소파 앞에 나란히 앉아 TV를 켰다. 여름 특집으로 바닷가에서 미션을 수행하는 오래된 예능이 재방영 중이었다. 미션에 실패해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한 멤버를 보며 깔깔거리다가 현수가 문득 해수욕을 가자고 했다. 오랜만에 바다 수영이 하고 싶어진 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수의 직장을 따라 이사 온 이 집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는 5분 거리에 있는 바닷가였다. 지현은 베란다 구석에서 접이식 그늘막과 작은 아이스박스를 꺼내왔다. 현수는 할인마트 사은품으로 받은 촌스러운 장바구니에 샤워 타월과 돗자리를 챙겨 넣었다. 똑같은 선글라스, 똑같은 샌들을 신은 둘은 바닷가로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스텔라?" 지현이 물었다.

 "당연하지."


 챙겨온 아이스박스에 시원한 생수와 캔맥주를 담았다. 바닷가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뜨겁게 달구어진 백사장과 찐득한 바람이 그야말로 여름 바다스러웠다. 현수는 돗자리를 깔고 지현은 접이식 그늘막의 폴대를 조립했다. 익숙한 솜씨로 그늘막을 완성한 지현은 짐들을 한데 잘 모아두고는 몸을 풀기 시작했다. 현수는 구석구석 선크림을 발라댔다. 일부러 많이 짜서 남긴 선크림은 지현의 얼굴에 덕지덕지 발라주었다.


 "아아, 너무 덥다. 난 이제 들어갈래."

 "잠깐만, 다 바르고 들어가." 


 이내 왼쪽 볼에 제대로 펴 발라지지 않은 선크림을 묻힌 채 지현은 바다로 첨벙첨벙 걸어들어갔다. 고개를 저으며 현수는 지현을 따라 들어가 헤엄을 쳤다. 해수욕을 하기에 딱 좋은 온도였다. 얼마간 헤엄치던 둘은 적당히 일렁이는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잠시 둥둥 떠있었다. 잔잔하게, 리듬감 있게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것이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둘은 그렇게 멍하니 물에 뜬 채로 하늘을 쳐다봤다. 길쭉한 구름 안에 비행 요새가 숨어있을 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든 지현이었다.


 "목마르다. 슬슬 돌아갈까?" 현수가 말했다.

 "맥주 마시고 싶어."


 바닷가로 나온 둘은 커다란 샤워 타월로 몸을 대충 닦았다. 발에 모래도 제대로 털지 않은 채 그늘막에 넘어지듯 앉았다. 아이스박스에서 냉큼 캔맥주를 꺼내 마셨다. 입가에 묻은 짠맛도 함께 들이켰다. 한 캔을 금세 비우고는 그대로 누워버렸다. 바람이 온몸을 더듬는 탓에 몸에 힘이 풀어진 둘은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지현은 꿈을 꿨다. 여전히 바닷가에 있느라 꿈인 줄 몰랐다. 지현은 모래로 성벽을 쌓았다. 파도가 모래 성벽을 무너뜨리면 다시 쌓았다. 현수가 옆에 와 함께 성벽을 쌓았다. 또다시 파도가 모래 성벽을 무너뜨리자 지현은 인상을 쓴 채 모래를 한 움큼 쥐고는 바다에 던졌다. 그 모습이 귀여운지 현수는 깔깔 웃었다.


 "안 할래." 지현이 말했다.

 "그럼 그냥 앉아 있자."


 둘은 나란히 앉았다. 파도가 미안한지 둘의 발을 살살 간지럽혔다. 파도가 훑고 간 자리에 현수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파도가 현수의 이름을 지우자 현수는 지현의 이름을 적었다. 파도가 지현의 이름도 지우자 현수는 말했다.


 "이제 우리는 바다가 된 거야. 언제나 함께일 거야."

 "언제까지라도?"

 "언제까지라도."

 "어디까지라도?"

 "응, 어디까지라도."


 잠에서 깬 지현의 두 눈가가 촉촉했다. 먼저 깨어난 현수는 가만히 지현을 구경하고 있다가 잠이 깬 지현에게 물었다.


 "우는 거야?"

 "울긴 누가 울어."

 "우는 게 어때서. 울면 되잖아."


 지현은 뒤척이며 돌아누워버렸다. 파도 소리가 잔잔하게 들렸다. 



from.만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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