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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느 저자 Oct 15. 2021

[여름호] 넷째주, 하다 : 우리가 우리일 때

여름호 네번째 주제 : 어른

내리쬐는 햇빛에 본인도 모르게 눈을 찡긋 감아본 적이 있어? 우리가 오래전 처음 만났던 곳도 햇빛이 쏟아지는 한낮이었어.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모습의 프로필 사진과 달리 한껏 가벼워진 몸이지만 표정만큼은 여전했던 언니였기에, 저 멀리 다리 건너에서부터 한눈에 언니임을 알아볼 수 있었지. 훗날에 말하기를 이 첫 만남 때부터 ‘서로가 서로임’을 느꼈다고 말했어. 첫 만남에 꽤 길거리를 빙빙 돌면서 서로의 삶을 풀었기 때문이야. 언니는 용사였어. 살아왔던 세상을 등지고 꿋꿋하게 맞서고 있었지. 그런 언니를 보면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삶을 푼 것이 아니라 나아가기 위해 삶을 풀기로 마음먹었어.

9월의 이집트는 나름만의 가을을 유지하고 있었어. 하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한낮의 여름 같았어. 마치, 미친 듯이 끓어오르는 냄비의 불을 끄면 얄밉게도 한순간에 가라앉는, 그런 9월 말이야.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어. 그래서 함께 살기로 했지. 둘 중에 먼저 아침에 눈을 뜬 사람이 커피를 내려놓고 ‘잘 잤어?’라고 말하며 하루를 시작했어. 바다에서 자유로이 유영하고, 늘어지게 낮잠을 자다가, 저녁을 먹어야 한다며 요란법석 하게 과일을 산더미 사 와서 샐러드를 해먹을 때도 생각나. 어떤 날은 좋아하는 와플 집에 종일 앉아 글을 쓰기도 책을 읽기도 했어.
나는 언니와 함께했던 일보다 그때 했던 대화들이 특히 그리워, 나이와 출신 성별을 떠나 누구든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대화였거든. 나는 훗날 그런 대화를 보고 스펙트럼이 넓은 대화였다고 말해.

그러던 중 유난히 아침밥을 만들기 귀찮은 날, 눈곱을 떼면서 슬리퍼를 질질 끌고 같이 브런치 가게로 향했어. 우리는 브런치를 먹는 둥 마는 둥 먹으며 엉뚱하게도 실반지를 만들기 시작했지. 발 한 쪽씩을 다른 발 위에 올려두고 열심히 실반지를 만들었어. 우리는 주제를 던져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날은 늙음에 관해서 이야기가 나왔어.

언니는 멋쟁이 할머니가 되고 싶었어. 삶의 경험치로 넓어진 여유를 가지고 매일 새로운 꿈을 꾸는 그런 멋쟁이 할머니가 말이야, 그런 할머니가 되기 위해서 나만의 신념을 가지고 죽는 날까지 끊임없이 세상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덧붙였어.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언니만큼 완벽한 어른은 없다고 생각했어.

우리는 서로가 원하는 여행을 따라 잠시 헤어짐을 가졌어, 그리고 남미에서 다시 만났지. 여전한 우리는 때론 감정을 쫓아 때로는 이성을 쫓아서 여행했어. 하지만 그 와중에 낭만을 놓치지 않고 달려갔지.

매번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야, 의견이 달라서 몇 시간 동안 논하기도 했어. 하지만 논할 때도 서로에 대한 존중을 놓치지 않았어, 무엇보다 이 일로 우리가 틀어질 수 없다고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도 몰라.

그렇게 여행을 즐기던 중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서 귀국을 결정하게 됐어.
그 과정에서도 언니와 수많은 의견이 오갔지만 우리는 귀국행으로 한뜻을 모았어. 나는 불안함 속에서 확실한 결정을 내리면 오히려 냉담해지는 편이라, 남은 일정을 잘 즐겨야겠다며 평소와 같이 하루를 보내고 있었어. 언니 또한 그러리라고 생각했어.

게스트 하우스만 고집했던 여행을 끝내고 우리는 안전을 위해 에어비앤비만을 전진했어. 나는 방 안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고, 언니는 밖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언니가 노래를 크게 부르면서 방방 뛰는 거야. 그게 너무 웃겨서 카메라로 담아냈지만 사실 그건 언니의 불안함을 말하고 있던 거였어. 개인적인 건강과 코로나로 인해 틀어진 모든 계획이 언니를 흔들었던 거야. 처음으로 언니에게 미세한 균열이 보였던 순간이었어.

언니가 처음으로 불안함을 고백했어.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서로를 토닥였어. 아무런 말 없이 그저 토닥였어. 상대가 스스로 길을 찾기를 기다리면서 말이야.

언니를 토닥이면서 문득 나는 언니의 불안을 보고 완벽한 어른은 없다고 생각했어. 언니가 완벽한 어른이 아니라서 실망했다는 뜻이 아니야. 오히려 나는 언니의 그런 모습을 인정하고 그것을 안고 나아가는 모습에서 새로운 멋짐을 느꼈어.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는 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니까. 다시 생각해보면 모두에게 오늘은 처음 맞이하는 날이기에 아무런 불안감 없이 매사에 용사처럼 나아가는 이들은 찾기 힘들 것 같아.

그러기에 우리는 서로의 불안함을 공유하면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어. 서로의 연약함을 어루만질 때, 우리를 우리에게 만들어주니까. 결국 개인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일 때, 완벽한 어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느꼈어.

우리는 다시 우리가 되어, 천천히 일정에 맞춰 귀국을 향해 갔어. 물론 낭만을 놓치지 않고 말이야.
그렇게 우리는 차분하게 귀국을 향하는 마지막 비행기를 탔어. 그리고 그날 꿈을 꿨어.

꿈속에서 저는 보따리에 내가 고른 꽃들을 한 아름 담고 달렸어 꽃 같지 않게 달릴 때마다 너무 무거워서 하나씩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더 뛰었어. 쉴 때마다 그 꽃을 들여다보는 걸 잊지 않았어. 왜 달리는지 모르지만 어떻게 달려야 할 지는 알았어. 그랬기에 무작정 달리고 달렸더니, 그 끝에 한 어린아이가 서 있었어. 그 어린아이에게 그 꽃들을 다 건네주니, 그 아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 자리를 떠났어. 나는 더 움직일 수 없고 그저 그 아이가 달리는 모습을 바라봤어.


from.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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