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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느 저자 Oct 18. 2021

[여름호] 넷째주, 은희 : 어른이 돼가는 중입니다

여름호 네번째 주제 : 어른

1.
한낮의 열기가 거짓말같이 선선한 밤이었다. 남자친구와 호수공원 산책로를 따라 산책을 하고 있었다. 기분 좋은 날씨는 우리만 느낀 게 아닌지, 많은 사람이 나와서 한여름 밤을 즐기고 있었다. 언덕을 따라 올라가며 산책하는 도중 건너편으로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매가 킥보드를 타고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이제 내리막길이야! 조심히 내려가!”
“응, 오빠!”

말과는 다르게 바람을 가르며 세차게 내리막길을 내려가고 있는 남매를 보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 애들 보니까 어렸을 때 생각난다. 막 자전거 타고 내리막길 내려가면서 만세도 하고, 놀이터 가면 그네 기둥 위나 꼭대기 위에 곧잘 올라가곤 했는데 말이야. 인라인이나 그거 알아? 신발인데 밑에 스프링 같은 게 달려있어서 퐁퐁 위로 뛰어다니는 신발? 그거 타는 것도 좋아했는데… 이렇게 보면 지금과 다르게 어렸을 때는 꽤 활동적이었단 말이지.”
“겁이 없던 아이였네.”
“맞아, 그때는 뭔가 겁이 없었지.”


‘겁’이라는 단어가 나오니 왜인지 모르게 씁쓸해지는 순간이었다. 어렸을 때와는 다르게 겁쟁이가 돼버려서인가. 이제는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내려가도 손잡이를 더 꽉 붙잡을 뿐이고, 놀이터를 지나가다 아슬아슬하게 꼭대기에 올라가는 아이들을 보면 보는 내가 더 아찔할 정도이니. 무엇이든 도전해보던 어렸을 때와 다르게 지금은 수없이 망설이기만 한다.
어쩌면 나이가 들어가면서 ‘앎’이 늘어갈수록 ‘겁’을 얻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게 처음이기에 과감히 도전해볼 수 있었던 그때와 다르게, 지금은 많은 것을 경험해봤고 보아왔기에 망설여지는 것이다. ‘저렇게 자전거를 타다 넘어지면 다칠 거야.’ ‘저번 일도 실패했는데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이미 예전에 실패했기에, 비슷한 일을 경험해봤기에.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많은 것을 외면했던 지금까지의 나를 되돌아보니 입안이 텁텁해져 버렸다.

앞으로도 나는 지금보다 더 겁쟁이가 되어있을 것이다. 나이가 하나둘 들어가며 얻은 많은 것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전보다 더 얇아진 몸과 마음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
까마득한 내리막길, 손잡이를 꼭 붙잡던 손을 떼고 활짝 벌린 양팔로 느껴지던 바람이 그리운 밤이었다.


2.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 갑자기 피자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앞 피자집에서 미리 주문 넣은 피자를 찾고 집으로 걸어가는 도중 웃기게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나 어른이 됐구나.’

피자를 먹고 싶을 때 사 먹을 수 있다는 상황에서 ‘어른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던 그 날, 과연 어른이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 또한 생겨났다. 어른이라는 게 단순히 나이가 듦을 표현하는 거라면, 왜 사람들은 어른이 되길 바랐던 어렸을 때와 다르게 커가면서 나이가 드는 현실을 거부하는 것일까. 아마도 어렸을 때 바라봤던 어른이라는 거대함이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교복을 벗으면 모든 게 내 뜻대로 될 것 같았던 20살도 학생 때와 다를 바 없었고, 돈에 대한 걱정이 없을 것 같던 직장인도 오히려 돈에 더 허덕일 뿐이었다. 내가 걱정하는 수 없는 고민도 어른이 되면 다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때에는 또 다른 걱정만 늘어날 뿐이었다. 20살이 되면 25살이, 25살이 되면 30살이, 30살이 되면 40살이…. 우리는 오지 않은 미래의 어른에 대한 희망을 품으며 살아가지만, 어느 순간부터 속으로 인정을 해버리고 만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걱정과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어른이 모든 해결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른에 대한 기대감이 유독 강했던 나는 법적으로 불리는 성인이 된 이후부터 나에 대한 실망이 강하게 찾아왔었다. 내가 이상했던 어른은 그저 이상일 뿐이었고 나이를 먹어봤자 결국 나는 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날, 슬프지만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거대한 어른’이 아닌 ‘어른이 된 나’에게 초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29살의 나는 28살의 나보다 좀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해줬다. 지금의 나보다는 덜 실수하고, 지금의 나보다는 더 지혜로운 내가 될 것이라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아가고 나의 가치관을 깨달으며, 그렇게 이상의 어른이 아닌 되고 싶은 나에게 다가가는 것이라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를 좀 더 뚜렷하게 만들어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와인이 숙성할수록 그 맛이 진해지는 것처럼, 한 해가 지나 더 진실한 나를 품어가며 나만의 맛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생각하면 캄캄한 미래가 마냥 두렵지만은 않다.

피자를 사 들고 집에 들어가던 그 순간, 되돌아보니 나는 그때 새로운 나를 발견했던 것 같다. ‘치느님’의 존재로 인해 갈팡질팡했던 과거였지만 나는 치킨보다는 피자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 의미로 오늘 밤엔 피자를 먹어야겠다.


from.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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