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외 샐러드, 그리고 자기실현적 예언
"무슨 과일을 가장 좋아하세요?"
물었을 때 '참외'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아직 만나지 못했다.
수박, 복숭아, 딸기 같은 화려한 과일들이 먼저 떠오르고, 참외는 늘 한참 뒤에나 언급된다.
흔해서일까? 나도 참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오이, 멜론의 중간 같은 맛.
노랗고, 동글동글 생긴 것도 귀엽고, 깎기도 편하고, 값도 싼데.
그런데 며칠 전 인터넷에서 발견한 레시피대로 '참외 샐러드'를 만들어보았다.
얇게 썰고 씨 부분의 즙을 걸러내 레몬즙과 올리브유, 소금, 후추를 섞어 드레싱을 만든다.
냉장고에 차갑게 넣어 두었다가 한입.
처음 알았다. 참외가 이렇게 맛있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나는 참외를 한 번도 제대로 대접해 준 적이 없다.
껍질을 대충 슥슥 벗기고, 익숙한 맛을 기대하며 아무 생각 없이 베어 물었던 기억뿐.
그런 나에게 참외는 늘 싱겁고 심심한 과일일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를 빌려 참외에게 심심한 사과를 건넵니다)
조금만 다른 방식으로 다가가니 전혀 새로운 면이 보였다.
사람 생각이 났다.
참외 같은 사람들.
우리 주변에도 있다.
처음엔 별 감흥 없이 스쳐 지나가던 사람.
늘 조용하고 튀지 않아서 잘 보이지 않던 사람.
혹은 '이 사람은 원래 이런 성격이야'하고 단정 지었던 누군가.
하지만 아주 작은 계기로,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그 사람이 보여준 한 마디, 행동 하나가 인식을 바꿀 때가 있다.
그제야 뒤늦게 깨닫는다.
아, 내가 이 사람을 너무 좁게 보고 있었구나.
이런 걸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내가 어떤 기대를 품고 사람을 대할 때, 그 기대가 말과 행동으로 스며들고, 결국 그 사람도 그에 맞춰 반응하게 되는 현상이다.
"넌 별로야"라는 태도로 다가가면 그 사람도 위축되고, "넌 가능성이 있어"라는 믿음으로 다가가면, 그 믿음을 닮은 반응이 되돌아온다는 거다.
다시 참외 샐러드로 돌아와서,
참외를 얇게 써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자른 조각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손으로 살짝 잡아준다.
칼을 뺄 때는 달라붙은 참외 조각들을 떼어내면서 다시 모양을 만들어줘야 한다.
너무 두꺼우면 가지런해 보이지 않고, 너무 얇으면 찢어져버린다.
어렵지만 왠지 그 일이 좋다.
가지런히 얇게 썰려 접시에 담긴 참외를 보면 기분이 좋다.
우리는 때때로 무언가를 바꾸고 싶어 하면서도,
그 대상이나 사람을 다루는 나의 태도는 그대로인 경우가 많다.
과일이나 사람이나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다뤄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 세상의 모든 변화는 언제나 누군가의 마음 한 구석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너무 익숙하다고 그냥 지나치고 있진 않았는지.
좀 더 천천히, 조심스럽게 바라보려는 마음이 있었는지.
그렇게 하면 안 보이던 게 더 잘 보일 수 있다는 걸 참외에게서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