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가을날이었다
딱히 어디 갈 만한 곳이 없어 밖으로 나온, 그런 가을날이었다.
볕 좋은 산자락에 앉았다.
나무와 산은 단풍에 절여지고, 저 멀리 들판에는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뜨거운 햇살을 피해 그늘 밑으로만 움직이던 바람도 이제는 햇볕 아래에서 같이 가을을 즐기고 있다. 저기 바람에 흐르는 윤기 좀 보소. 그리고 얼마나 잘 먹으며 돌아다녔는지 바람이 토실하다. 주위 풀꽃들이 살랑살랑 흔들린다. 바람도 덩달아 신이 나서 다시 산으로 들로 싸돌아다닌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박새가 덤불을 뒤진다. 바람 하나가 작은 소리 내며 내 곁으로 온다. 조심성 많은 박새 한 마리가 나무 위로 날아오른다. 다른 박새들도 영문 모르는 채 나뭇가지로 따라 오른다. 고요하다. 다시 박새 한 마리가 덤불로 내려앉는다. 다른 박새들도 따라 내려와서 덤불 속을 뒤진다. 바람 한 줄이 올 때마다 무한 반복이다. 라벨의 볼레로다.
풀꽃들이 말라가고 있다. 여태 꽃의 부피와 무게도 잘 견뎌왔는데, 이제는 가벼운 씨앗의 무게에도 줄기가 꺾인다. 결국 그 무게도 감당할 수 없어 땅에 떨어트린다. 떨어진 풀꽃 씨앗들은 겨울 내내 봄을 꿈꾸는 벌레처럼 흙 속에 천천히 스며들 거다. 더러는 바람이 먼저 채 가기도 하고 또, 더러는 지나가는 산짐승의 몸에 붙기도 하며 먼 곳으로 떠날지라도 악착같이 살아갈 거다.
주위에 흔히 보이는,
가을에 싹이 나는 새포아풀, 바랭이풀 등의 끈질긴 생명력은 놀랍다. 이러한 풀을 인간의 필요나 유∙무해에 따라 잡초라고도 부른다. 비록 잡초로 다르게 불릴지라도 이름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다가와 있다는 것이다.
잡초도 새싹 틔우고 꽃 피우고 씨앗도 맺는다. 다 같은 풀이고 풀꽃이다. 손끝에 힘을 주어 뽑는 시늉이라도 하면 끝까지 살아남으려고 땅을 꽉 쥐고 버틴다. 잡초, 훌륭하다. 다 예쁘다.
누구의 자리인지 바람의 옆자리는 비어 있다. 곁에서 쉬어가던 바람이 다시 산자락을 오른다. 등 뒤에서 톡, 후드득 소리가 들린다. 풀벌레는 익숙한 듯 조용히 계속 운다. 뒤돌아보면 아무것도 없다. 도토리가 떨어지는 소리다.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 참나무라 하는 갈참나무에서 도토리가 떨어졌다. 주위를 자세히 살피니 도토리가 모자를 뒤집어쓰고 햇살 아래서 소복이 모여 반짝인다. 귀엽다. 언덕 쪽에서도 툭, 후드득 하며 조금 큰 소리로 도토리가 떨어진다. 굴참나무도 나를 봐달라고 도토리를 떨어뜨린 것이다. 참나무 중 졸병 참나무인 졸참나무는 아직 어려서 가지를 열심히 흔들어도 떨어지는 도토리가 없다. 그래도 바람에 잎을 떨며 제법 가을 소리를 낸다. 잠시 조용하던 풀벌레 소리가 다시 크게 들린다. 윤기 흐르는 바람 아래서 풀벌레가 서로 사랑 나눈다.
저 멀리 산으로 오르는 산길이 보인다. 길모퉁이에 노란 산국이 곱게 피어있다. 모든 길이 그렇지만 산길은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다. 길 내내 한 번밖에 볼 수 없는 가을풍경 들, 햇살에 꼿꼿이 서 있으려고 하나 바람에는 눕고 마는 마른 들풀들, 모두가 가을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이다.
그러고 보니 봄과 가을, 햇볕의 온도는 같으나 느낌이 다르다. 봄 햇살은 솟아올라 퍼지고, 가을 햇살은 퍼지며 가라앉는다. 그래서 가을 속 산길을 걷는 발걸음이 봄 속 발걸음과 다를 수밖에 없다.
산자락 길을 지나 산등성이 길에 닿았다. 짙은 그림자를 만드는 바위에 앉았다.
길가 나무들이 빨갛게 혹은 노랗게 가을 햇살 속에 서 있다. 취한 것이 맞다, 술인지 가을인지 모르겠지만. 취하면 얼굴빛이 모두 다르듯, 취한 나무들의 단풍 빛깔도 제각각이다.
옆 나무를 보니 나뭇가지 사이에 쳐진 거미줄에 나비 날개가 달의 박피薄皮처럼 거미줄에 걸려있다. 무심한 바람 한 줄기가 거미줄을 흔들고 지나간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 날개는 나는 것을 잊지 않으려는 듯 따라 흔들린다.
햇살, 한 줌을 쥐고 뿌렸다. 단풍 든 잎이 반짝인다. 바람, 두 손에 담아 뿌렸다. 단풍 든 잎이 흔들린다.
또 걷는다.
굽이 진 산길. 멈춰 서다.
계속 가을 속 깊이 걸어 들어가면 돌아 나올 수 없을 것 같아, 산자락으로 되돌아 내려왔다.
솔직히, 저 앞의 깊고 짙은 가을이 겁났다.
딱히 어디 갈 만한 곳이 없어 밖으로 나왔으나 결국, 깊은 가을 앞에서 막힌 그런 가을날이었다.
(공주에서 찍은 사진 들. 2024년)